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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태조 왕건_고려

by 붕스 2023. 10. 13.

태조(877년 1월31일~ 943년 7월 4일)는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통치한 고려의 창시자며 태조 왕건이라고도 불립니다.

왕건은 918년부터 943년까지 통치하였고 936년에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북한 고려박물관에 전시된 왕건 어진

 

일생

왕건은 877년 왕융의 첫째아들로 송악(현재 개성)에 거점을 둔 유력한 해상상인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사에 인용된 편년통록에 따르면 왕건의 할아버지 착체곤은 당나라 수종의 아들이었습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왕건의 조상들이 대대로 중국과 해상무역을 했던 강력한 지역 강자였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왕건은 격동의  후삼국시대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신라 후기에는 많은 지방 지도자들과 도적들이 백성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충분한 리더쉽이나 정책을 갖추지못한 진성여왕의 통치에 반기를 든 적이 있습니다. 이 반란군들 중 북서부의 쿵예와 서남쪽의 견훤은 더 많은 세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그들의 군대가 신라 관리와 도적에 맞서 싸우는동안 그들은 다른 많은 반란군을 물리치고 흡수했습니다. 895년 궁예는 송도가 있던 신라 북서부에 군대를 이끌고 갔습니다.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은 여러지방의 씨족들과 함께 궁예에게 항복했고 왕건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봉의 지도자가 될 궁예를 섬겼고 그는 궁예의 휘하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왕건의 군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곧 그를 장군으로 승진시키게 되었고, 그를 형제로 여겼던 궁예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900년 충주지역에서 지방의 씨족과 후백제군에 대항하는 작전을 성공시켜 왕으로부터 명성과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903년 그는 나주 금성에서 후백제 남서쪽 해안선을 상대로 유명한 해전을 지휘했고 견훤은 신라와 싸웠습니다. 그는 또한 여러 군사작전을 지휘하여 신라 통치하에서 가난에 허덕이던 사람들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리더쉽과 관대함 덕분에 대중은 그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913년 그는 새로 개칭된 태봉의 시중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궁예는 그의 지도력으로 왕국을 건국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을 부처라고 칭하기 시작했고, 그의 종교적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많은 승려를 처형하고 나중에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까지 처형했지만 백성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값비싼 의식과 엄격한 규칙은 더 많은 반대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918년 7월 24일 밤 태봉의 4대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은밀히 만나 궁예의 통치를 전복시키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왕건은 처음에는 그 생각에 반대했지만 후에 그들의 계획에 동의했습니다. 궁예는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실각하게 되고 철원 근처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다음날 오전에 장수들은 왕건을 새왕으로 추대했고 태조는 고려로 국호를 바꾸고 여기서부터 고려왕조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수도를 고향 송악(개경)으로 옮겼습니다.

 

불교를 고려의 국교로 선포하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 소유권을 주장하며 고구려의 후계자로서 정당한 유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918년 평양은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있었고 오랑캐들이 주변 땅을 사냥터로 이용하고 때로는 고려의 국경을 침범했기 때문에 왕건은 즉위 1년만에 신하들에게 고대 수도였던 평양에 다시 사람이 살게 명령했고 그의 사촌 왕식렴을 보내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평양을 서부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는 지역 씨족들을 정복하여 직접 지배하에 두는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맹이나 협력을 추구했습니다.

 

927년 후백제의 견원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경애왕을 붙잡아 처형했습니다. 그 후 고려로 군대를 옮기기 전 경순왕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신라를 구원하기위해 대구 근처 공산에서 5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견훤의 군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공산에 후백제군과 맞붙어 참담한 패배를 당해고 장군 김낙과 4대장군 중 신숭겸장군 등 대부분의 군세를 잃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태조와 신숭겸은 태조가 전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갑옷을 바꾸어입고 태조가 전장을 탈출하는동안 신숭겸과 나머지 군대가 후백제군과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고 함께 유인작전에 나섰던 8명의 장수가 전사하여 이곳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는 패배에서 빠르게 회복되어 후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나라를 재건할 방법이 없다고 느껴 신라의 전 국토를 왕건에게 넘겼습니다. 왕건은 기꺼이 항복을 받아들여 왕자의 칭호를 내리고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도 고려로 망명하여 왕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같은 해 견훤의 장남 견신검이 이복형제인 견금강을 왕위 계승자로 선택한 아버지를 상대로 견양검, 견용검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고 견훤은 유배를 당해 금산사에 갇혀있다 고려로 도망쳐 태조의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의 신검에 맞서 최후의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신검은 태조와 싸웠으나 많은 불리함과 내면의 갈등에 직면하여 태조에게 항복했습니다. 왕건은 마침내 후백제를 정복하고 통일신라 이후 두번째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태조는 적 조차도 자신의 연합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패배시킨 후백제, 신라와 비슷한시기에 붕괴된 발해 등 여러나라의 지배자와 귀족들에게 칭호와 토지를 주어 신라 말년에 부족했던 왕국의 안정과 통일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926년 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마지막 왕세자와 지배층 대부분이 고려로 피난을 가서 태조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지배층에 편입되면서 고구려의 두 후예국가가 통합되었습니다. 태조는 발해와 '친척의나라', '결혼의 나라'로 부르며 발해 난민들을 보호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고구려 출신이었습니다. 이는 발해와 적대관계를 유지한 후신라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에게 강한 적의를 나타냈습니다. 요나라는 942년 낙타 50마리를 데리고 30명의 사절을 파견했는데 외교적으로 큰 파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유배시키고 다리밑에서 낙타를 굶겨죽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자손에 대한 십계명 중에서 그는 거란족은 짐승과 다를 바 없으므로 경계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죽음

태조 왕건은 통일 7년, 재위 25년인 943년까지 통치하다 훈요 10조를 남기고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개성의 왕건 능 인 현릉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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