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923년 ~ 975년 7월 4일)은 고려의 4대 왕입니다.
일생
광종은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 왕소로 925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왕건의 셋째 부인인 충주유씨 신명순성왕후로 왕태, 왕여, 왕소, 왕정, 증통국사 아들 5명과 낙랑공주, 흥방궁주 두명의 딸을 낳기도 했습니다. 광종은 이복형제가 20명, 이복자매가 7명이 있었습니다.
왕무, 왕태, 왕요 세명의 명이 있어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왕태는 일찍 사망했고 왕무는 즉위 3년만인 945년 사망해 4년간 고려를 통치한 왕요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왕요는 죽기 직전에 외아들 경춘원군 대신 왕소를 후계자로 결정했습니다.
고려 문신인 최승로에 따르면 광종은 신중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으면 대담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외모와 자질을 가졌고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자시절 왕요를 정종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고 제왕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중 첫번째는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도움을 준 왕규였고 이는 혜종이 즉위한 후 손자였던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두번째는 혜종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하고 이후에도 그를 계속 지원했던 장군 박술희가 정종의 즉위를 위협하는 박술희 장군이었습니다.
949년 4월 13일 광종이 25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고려는 불안정했습니다. 후삼국 통일을 위해 아버지인 태조는 혼인을 통해 유력 호족들과 동맹을 맞었습니다. 그들을 만족시켜야하는게 중요했는데 그 가족들은 모두 자신들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광종은 왕권을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끼고 절대 군주제수립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호족들 권력의 증대와 영향을 피하기 위해 그는 호족들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왕실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첫째 부인인 대목왕후는 황주 황보가에서 태어난 이복누이였고, 고려 2대왕인 혜종과 첫째 부인 진주 임씨 의화왕후에서 태어난 경화궁부인이 두번째 부인이었습니다. 광종은 당태종의 제범을 공부하며 자신의 상황과 태종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고려의 발전에 기여한 모든 사람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또한 인근 국가들과 좋은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이로써 궁 내외의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고 즉위 7년 동안 안정적이고 왕실 중심의 정치 체제를 추진하고 경제와 군사를 확대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첫 개혁은 956년 노비안검법이었습니다. 호족집안에는 포로를 중심으로 사병으로 일한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평민보다 많았고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그들이 소속된 호족들에게 세금을 냈습니다. 광종은 그들을 해방시킴으로써 그들을 평민으로 바꾸어 호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에게 세금을 내게 하고 군인이 될 사람들을 확보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호족들이 반대했지만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대목왕후조차 법이 자신의 가족에게 영향을 끼치자 왕을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대외정책에 관해서는 광종이 후주, 송나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려 태조가 만든 중국과 고려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많은 사신들이 오가며 많은 물자가 보내졌습니다. 5대10국 중 하나인 오월과도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957년 후주의 관리이자 학자인 쌍기가 사절로 고려에 오게 되었고 광종은 그의 능력을 발견하여 잔류를 요청해 고려에서 관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조언으로 광종은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공덕보다 집안의 영향력이나 명성으로 관직에 오른 관리들을 추방하는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960년에 광종은 관복에 다양한 색을 도입하여 계급이 다른 관리들을 구분했습니다.
광종 때 가난한 환자에게 무료로 의약품을 제공하는 대비원이 개성과 평양에 세워졌고, 이후 혜민국으로 지방에 퍼졌습니다. 태조는 가뭄에 대비해 지역의 곡물창고인 흑창을 설립했고 광종은 곡물 대출에 이자를 받는 상점인 제위보를 추가했으며 그 돈으로는 가난한 자들에게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비록 수정된 형태일지라도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더 나은 재배 방법과 병행하여 향후 900년동안 지속되었습니다.
959년 후주의 시영이 갑자기 병사하자 7살된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많은 장수들이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북벌을 감행하던 장수들이 장군 조광윤을 황제로 추대하면서 후주는 무너졌고 조광윤은 송나라를 세우기 위해 전장에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만주산맥과 북평원을 거란족과 여진족에게 주었습니다.고려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광종은 군을 개편하고 확장하여 북동쪽과 북서쪽 국경을 따라 12개의 포대를 건설하였고 광종의 통치하에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으로 향하도록 국경을 옮겼습니다.
광종은 종교단체와 국가연합을 지방 호족들을 진압하기 위한 지원으로 보고 해인사 주지를 선택해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유능한 스님을 고문으로 맞아 사찰 건립을 추진하였는데 962년 충북 청주시에 용주사를, 973년 강원 춘천시에 청평사를 건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광종은 승과라고 불리는 불교승 시험을 만들어 하나의 명령으로 선종과 교파를 통일하려 했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된 다른 조치들은 고려를 제국으로 명명하고 중국과의 속국관계를 끝내는 것이며 개성을 황도, 평양을 서도라 부르고 연호를 광종이 즉위하면서 쓴 연호를 광덕에서 960년 준풍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963년까지 사용되다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광종은 자신을 황제의 위치에 놓음으로 자신에게는 절대적인 권력이 있음을 신하들에게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광종의 개혁은 귀족들, 특히 고려 건국 때 아버지를 도운 군과 문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귀족들의 반대가 그들을 반란으로 이끌었지만 이 시도들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재위 11년째인 960년 광종은 잇달아 숙청을 시작하여 반대파들을 죽였는데 그 중에는 반역죄로 독살된 동생 왕원과 혜종의 아들 흥화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등이 있었습니다. 광종도 당시 5세였던 장남 왕주를 믿지 않았습니다. 숙청이 끝난 후에도 태조의 공신 3200명 중 후삼국 통일을 도운 40여명만이 남았습니다.
죽음
975년 7월 중병이 발병한 지 불과 며칠만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북한 개풍군 송악산 북쪽에 있고 능호는 헌릉 입니다. 1916년 현장조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무덤이 발견되었지만 계단과 초석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고려 5대 왕을 외아들이었던 왕주가 이었습니다. 자본 귀족의 권력을 억제하는 개혁정책은 후계자에게 계승되었지만, 이를 추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관료제는 세습계급으로 바뀌었고, 노비안검법은 6대 왕인 성종 때 폐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