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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철종

by 붕스 2023. 9. 21.

철종(1831년 7월 25일 ~ 1864년 1월 16일)은 조선의 25대 왕입니다. 1849년 조선 헌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한 후 순원왕후는 영조의 후손인 철종을 왕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철종과 철인왕후가 묻혀있는 서삼릉 내 영릉

 

철종은 영조의 현손자이며 즉위 전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왕이 된 뒤에도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고 순원왕후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어있었습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전국적으로 부패를 초래했고 1862년 남쪽지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일생

철종(이원범)은 영조의 증손자 이광의 셋째로 태어났고 첩이었던 어머니는 염성화의 딸로 용담염씨의 후손이었습니다.

 

조선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1786년 반역죄로 강화도로 유배되었었고 은언군은 1807년 천주교 박해 당시 아내와 며느리가 신자라는 이유로 살해되었고 순조가 1822년 이들을 사면할 때까지 섬에 유배되어있었습니다. 은언군의 아들 중 하나였던 이광은 30대에 최수창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이원경을 낳았고 첩들에게서 얻은 또다른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1830년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철종은 어렸을때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아 네살때 천자문을 배웠고 나중에 자치통감과 소학을 몇권 읽었지만 내용은 별로 기억나지 않아 이듬에해 공부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1836년 남응중은 은언군의 손자 중 한명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반란을 꾀했으나 사전에 알려져 음모가 드러나게 되고 이들 무리는 처형되었습니다. 1844년 효현왕후가 사망하자 민진용이 철종의 이복형인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반란이 밝혀져 이원경은 사사되고 이원경 일가는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헌종은 1847년 후손없이 사망하게 되어 정조의 혈통은 끊기게 되었고 일부 관리들은 먼 왕족인 이하전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순원왕후는 가까운 친척에서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원범은 영조의 몇 안되는 후손이었고 그와 가족들을 강화도에서 데려오기위해 관리들을 보냈는데 그 행렬을 본 이원범은 할아버지와 큰형이었던 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었던적이 있어 자신을 잡으러 온 행렬인줄 알고 도망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원범이 궁궐에 도착하고 덕완군으로 책봉되었고 은언군의 후손들은 다시 왕족으로 대우받았습니다 철종의 부모는 생전에 왕실 칭호가 없어 각각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로 불리게 되고 철종의 다른 친척들도 회평군, 영평군, 풍계군 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849년 7월 28일 창덕궁에서 철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가 2년간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다음해 철종은 학업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원범'에서 '엽'으로 개명을 했으나, 청나라의 강희제와 발음이 너무 비슷하다고 다시 '변'으로 개명하게 되었습니다. 철종은 1851년 김문근의 딸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 여인이 후에 철인왕후로 불리게 됩니다 1858년에 철인왕후의 외아들인 영준이 태어나게 되지만 1년도 지나지않아 사망했습니다.

 

1851년 철종의 혼인에 이어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게 되나 여전히 순원왕후의 안동김씨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철종은 14년동안 그들의 지배로 취약한 허울뿐인 왕이었고 철인왕후도 안동김씨 출신이라 안동김씨 일가가 정부의 요직에 배치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1852년 철종이 직접 친정하기 시작하는데 어렸을때부터 서민들의 고통을 겪어본지라 초기에는 여러 개혁 정책들을 추진하려했습니다. 하지만 허울뿐인 왕의 자리라 요직을 다 차지한 안동김씨의 반발과 비협조로 거의 모든것이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이 심각하게 되어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지자 1862년 임술농민본기가 터지게 되는데 경상도 진주, 전라도 전주, 함경도 함흥, 제주도 등 반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농민봉기의 이유가 부정부패였다는것이 밝혀지면서 철종이 재정개편을 위해 직접 나섰지만 개혁은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조선은 수세기동안 소수의 나라와 교류를 통해 쇄국정책을 시행했고 철종 또한 쇄국정책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동안 조선 영해에는 유럽과 미국, 러시아의 선박이 자주 등장했고1850년 강원 울진군에 외국의 배가 출몰했고 일부 조선 관리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배가 떠나면서 포격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851년 청나라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의 상선이 제주도를 방문했고 1852년에 경상도 동래에 미국 포경선이 들렀는데 처음에는 현지인들이 미국인과 의사소통이 안되었으나 그들중 난파선에서 구출된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청나라의 수도가 영국군에게 침략당하고 이화원은 불에 탔는데 베이징은 조선과 가까워 그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에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일부 양반들과 관리들은 한성에서 도망치기도 했고 사람들은 외국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독교 십자가를 걸어놓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기위해 철종은 여러명의 사절을 파견하여 피난가 있던 함풍제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유럽국가들은 중국에서 몇가지 특권을 얻었고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 생각하여 조선에서도 같은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는 지상군과 해군을 통해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초부터 조선은 천주교가 불법이었지만 철종때는 박해가 상대적으로 가벼워졌습니다. 1857년경 조선에는 약 16만5천명정도의 기독교인이있었고 1863년 기준 조선에는 프랑스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가 12명 있었으며 몇년사이 한성 주변으로 기독교인이 10만명이 넘고 궁궐 내 관계자 일부에도 신자가 있었습니다. 후에 보면 고종의 어머니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천주교의 급속한 전파와 혼란드서운 사회에 대한 반응으로 최제우는 외국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동학을 설립하고 많은 추종자가 모였습니다. 최제우가 결국 붙잡혀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조선의 말기에도 계속 전파되었습니다.

 

철종이 몇 년 동안 난을 진압하는것 외에 후사도 갖지 못하고 있자 안동김씨는 왕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1851년 초도로 유배되어있던 소현세자의 후손 이명섭을 왕으로 추대하려했던 채희재가 처형되고 1860년 경평군(풍계군의 양자)이안동김씨의 세도를 비난하다가 신지도로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1862년 이하전을 즉위시키려했다는 이유로 김순성이 처형되고 이하전 역시 연루되었다고 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이하전은 1849년 헌종의 후계자로 유력시 되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에 불만을 표시하여 안동김씨는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편 흥선군(후 흥선대원군)은 다른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빈궁했으며 이하전과 가까운 친척 중 한명이었고 흥선군은 박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하층민들과 친해지고 기생을 쫓아다니며 모자란 행동을 해 안동김씨가 그를 멸시하고 신경을 많이 안쓰게 되었습니다.

 

철종의 어머니는 파주염씨에서 갈라져 나온 용담염씨였고 염종수라는 사람이 파주염씨로 철종의 외할아버지인 염성화의 족보를 위조해 용담염씨는 파주염씨에서 파생된것이므로 자신이 철종의 외숙부가 된다고 거짓 상소를 올리고 또한 염성화의 묘비에 용담이라는 글자 대신 파주를 써 위조하기도 했습니다. 염성화의 후손이 따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위조된것으로 염종수는 1851년 염성화의 후손이 되어 철종의 외삼촌이 되고 관료가 되었습니다. 1861년 용담염씨 염보길(철종의 사촌)이 이를 밝혀내어 철종은 염조수를 심문하고 처형시켰습니다.

 

죽음

일성록에 따르면 철종 즉위 이후 소화기가 약해 평생 만성질환을 일으키고 철종도 천식증상이 있고 감기에도 자주 걸렸습니다. 몸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많은 양의 한약재를 복용했지만 침이나 뜸 등 당시의 일반적인 치료법은 거의 문서에 실려있지 않은것이 현실입니다. 1864년 1월 16일 32세의 나이로 후사가 없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철종의 죽음은 불분명하고 명확한 공식 기록은 없었습니다. 철종의 사인이 간질환이나 결핵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기존 자료에 따르면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리긴 어렵습니다.

 

다시 전주 이씨의 먼 친척들을 수색하고 왕의 후계자를 찾아야하게 되어 내부에서는 논란이 되었습니다. 철종 자신도 흥선군의 둘째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습니다. 흥선군이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하며 이재황을 부적절한 후계자라 여긴 안동김씨들 대부분은 이 계승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철인왕후의 사촌인 김병학은 흥선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점에서 이를 강력히 동의했습니다. 고 익종의 어머니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는 당시 최고위 왕실의 일원으로 이재황을 친히 양자로 삼기로 하고 자신의 가문인 풍양조씨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철종의 미망인인 철인왕후는 집안의 권력이 있기때문에 왕위 계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이재황에게 왕위 계승을 요청하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재황이 궁궐에 도착하자 신정왕후는 궁중의 예가 아님에도 직접 영접했고 곧바로 철종이 아닌 익종의 후계자라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재황은 조선의 새로운 왕, 고종이 되고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군은 안동김씨의 세력을 탄압하고 이후 10년간 독재자가 된 흥선대원군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의 예릉에 철인왕후와 함께 묻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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