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는 조선의 21대 왕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의최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왕이 되기 이전에는 연잉군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영조의 삶은 생모의 태생이 천출인것에 따른 정치적 내분과 분노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이복 형인 이윤(경종)이 20대 왕으로 즉위한지 몇달 뒤인 1720년에 연잉군은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파벌간에 큰 논쟁을 일으켰고 4년 뒤 경종이 사망하게 되어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영조의 치세는 52년 가까이 되며 탕평정책으로 당파싸움을 최소화하고 화해시키려고 했으며 조세제도를 개혁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1762년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유교윤리에 의해 통치하려는 노력으로 한국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일생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숙종의 장남 이윤세자가 33세에 경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숙종은 1720년 사망하기 전 이이명에게 경종의 후계자로 연잉군을 지명하라고 한 것으로 추정이 되나 역사학자나 서기가 없는 상황에 한 행동이라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때 노론은 연잉군을 위해 즉위한지 얼마 안된 왕이 물러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경종이 즉위한지 몇달만에 연잉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는 권력투쟁을 격화시켜 1721년 신임사화로 이어졌습니다. 노론은 왕에게 탄원서를 보냈지만 소론은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했습니다. 즉 노론이 권력을 빼앗으로 한다고 하여 여러 직위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소론은 궁내에 서성이고 있다는 흰여우 사냥을 가장해 연잉군을 암살하려 했지만 양모인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살 수 있게 되고 후에 왕에게 가서 평민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1724년 10월 11일 경종의 사망으로 소론은 연잉군을 왕으로 만들려고한다는 노론세력의 시도로 연잉군도 경종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1724년 10월 16일 연잉군은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교사상에 심취했고 다른 신하들보다도 고전에 관한 지식이 더 풍부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영조의 손자 정조 때에는 유교가 최고조에 달했고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임진왜란과 두번의 호란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완전히 회복하는 등 그의 통치는 조선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로 불리고 있습니다.
영조는 백성들을 위해 깊은 걱정을 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영조 재위 4년째에 백성을 걱정하는 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비가 많이 와 수확을 망치고 불행한 백성들이 굶을까봐 걱정된 영조는 신하들에게 세금을 줄이고 자신의 식사에 나오는 음식의 수를 줄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조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명석하고 밝고 자비롭고 또한 친절한 왕으로 설명했고 영조도 통찰력이 풍부하고 이해력이 좋았습니다.
영조는 파벌싸움이 국정운영에 악영향을 끼친다는것알 알고 즉위와 동시에 끝내려고 했고 병역세를 절반으로 줄이며 어업, 소금, 선박 등에 대한 세금과 토지세를 추가로 부과하도록 하였습니다. 회계제도를 채택하여 국가 세입과 경비 등 재정체계를 정기화했고 현실적인 정책으로 경상도 산간벽지에서 인근 항구까지 곡물에 대한 세금을 면화나 현금으로 낼 수 있게 했고 주화 주조의 증가로 통화의 유통이 빨라졌습니다.
상업활동은 급속하게 증가했습니다. 독점과 도매를 통한 자본 축적은 상인조직을 통해 확대되었고 많은 상인들이 한성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양반이나 서민들이 상인 활동을 하는데 한성은 18세기에 상공업도시로 큰 발전을 이루었고 칼, 밥상, 놋그릇 등 수공예품과 상품에 대한 인기는 점점 많아졌고 양반신분을 나타내는 말털모자의 착용 제한이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왕은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임명하고 아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박문수는 왕의 이름으로 부패한 지방관을 체포하며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영조의 재위기간 중에 일어난 비참한 사건은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것입니다. 역사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앓아 궁궐 내 사람들을 무작위로 살해하고 궁녀들을 강간했습니다. 영조는 며느리와 손자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아들을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에 1762년 7월 사도세자를 뒤주에 들어가라 명하고 이틀 뒤 뒤주를 밧줄로 묶고 풀로 뒤덮어 상궁으로 옮겼습니다. 사도세자는 7일째 밤까지 반응 했으나 뒤주가 열린 8일째에 사망하였습니다. 19세기에는 사도세자가 정신적으로 병든것이 아니라 조정의 음모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부인이 쓴 회고록과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모순되는 얘기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세자로서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효장세자와 효순왕후의 양자로 들일것을 명했습니다.
죽음
영조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었고 기생충에 감염되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예방책을 강구했고 이것이 영조가 조선의 최장수 왕으로 알려지게 된 원인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도세자가 사망한지 14년 만에 그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이산(정조)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고 정조의 재위 초기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만든 것에 대해 복수를 할까 궁정관료들은 많이 두려워했었습니다.
1776년 3월에 영조는 경희궁에서 사망하였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원릉에 정순왕후와 나란히 묻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