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나라의 왕 들

효종

by 붕스 2023. 9. 19.

효종(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버리자는 북벌론을 펼쳤고 또한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파병까지 했던 조선시대 17대 왕입니다. 북벌론과 다른 개혁들을 제대로 시작하기전에 사망하게 되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습니다.

 

효종 영릉의 인선왕후릉

 

일생

효종은 1619년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당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가 왕이 되자 효종은 아버지와 함께 궁궐로 불려갔고 1626년 봉림대군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1627년 인조의 강경한 외교정책은 조선과 후금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이었습니다. 이후 1636년 후금이 만든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와 조선이 패하게 되며 인조는 삼전도에서 9차례에 걸쳐 홍태지의 발밑에 머리를 숙여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곳에서 인조와 홍태지는 삼전도의 조약을 맺고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인질로 중국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효종은 중국으로 끌려갔을때 청나라의 위협으로부터 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홍태지와 청나라의 군대는 아직 명나라와 전쟁 중이며 소수의 몽골족과 이슬람교도와도 전투를 하고 있어 여러차례 청나라 황제가 소현세자에게 전장에 나가 청나라 적에 맞서 군대를 지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은 소현세자가 조선의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로 군사적 경험이 아직 없기 때문에 형을 걱정했습니다. 형을 대신하여 명나라 군사와 싸웠고 소현세자를 따라 서부전장에서 위구르족과 전투를 했습니다.

 

형과 함께 중국에 머무는 동안 유럽인들과 접촉하면서 조선이 외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보다 강력한 정치 군사체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것도 배웠고 자신의 가족과 모국에서 강제로 떨어져 있게 되어 청나라에 대한 원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1636년 벼자호란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북벌론을 펼치기로 결심한것은 이시기였습니다.

 

1645년 인조의 뒤를 이어 나라를 통치하는것을 돕기 위해 소현세자가 홀로 조선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소현세자의 유럽문화에 대한 개방적 시각과 청나라에 대한 외교적 시각을 싫어하는 인조와 종종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어 짦은 장례식 후 바로 매장되었습니다. 그 후 인조는 남편 죽음의 진짜 이유를 밝히려돈 소현세자의 부인도 처형했습니다. 일설에는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가져온 벼루로 아들을 때려죽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남이었던 경선군을 세자로 책정하는 대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조선의 17대 왕이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 조선의 군대를 개혁하고 확장하기 위해 먼저 정치를 타락시키고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갖고있는 김자점을 제거하였습니다. 이후 송시열과 김상헌을 조정으로 불러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의 군사적 확장은 매우 커서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압록강변에 여러개의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핸드릭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선원 무리가 제주도에 표류하자 효종은 그들에게 소총을 만들게 명령했고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군사에게 소총이 지급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번영을 계속하여 1644년 명나라 정복에 성공한 후 급속하게 서쪽으로 확장하였습니다. 청나라는 대규모 한족을 편입하게 되어 조선의 군대는 개혁과 확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확장된 군대는 1654년 청나라가 러시아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원조를 요청했을때 처음 실전에 투입었습니다.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승리한 후통전투는 조선의 총사 150명과 청나라 군사 3000명이 러시아군과 대전한것입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658년 효종은 청나라를 돕기위해 다시 군대를 보냈고 신류장군이 이끄는 260명의 조선 총사와 대표병이 사르후다 장군의 군대에 합류했고 조선과 청나라의 연합군은 무단강과 송화강을 따라 항해해 아무르 코사크 휘하의 러시아군가 만나게 되어 270명의 러시아인이 사망하고 청나라에서 물러났습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효종의 개혁이 조선군을 안정시켰음을 증명했지만 다시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조선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북벌론은 나선정벌로 알려져있습니다.

 

죽음

그의 통치기간 동안 농업에 관한 많은 책이 출판되어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농업이 개선되게 되었습니다. 효종도 광해군의 재건을 계속했으나 군사력을 확장하는 동시에 경제회복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탄환을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는 금속으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야했지만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서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국내외 많은 문제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1659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북벌론은 결코 실행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효종을 나라의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총명하고 용감한 왕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효종의 죽음은 종기를 치료하다 의료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에 묻혔지만 후에 경기도 여주시의 영릉으로 이장하게 되었고 인선왕후와 앞뒤로 나란히 묻혔습니다. 

 

효종의 장례절차에 대해 논쟁이 좀 있었으며 그의 죽음 후에 조선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사상논쟁인 예송논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왕 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종  (1) 2023.09.19
현종과 숙종  (0) 2023.09.19
인조  (1) 2023.09.14
선조  (0) 2023.09.12
인종과 명종  (0) 202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