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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선조

by 붕스 2023. 9. 12.

선조(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는 즉위 초기에 유교를 장려하고 국정을 쇄신한 조선의 14대 왕입니다. 그러나 이후 임진왜란 당시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했고 무능한 지도력으로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후에 선조가 이장되어있는 목릉

 

일생

선조는 1552년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에서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아들로 휘는 연 입니다. 조선왕조 처음으로 선조는 적통 출신이 아닌 임금이었는데 명종의 하나뿐이었던 아들이 요절을 하고 다른 후사가 없자 하성군이 명종과 인순왕후의 양자로 입양되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서자 출신이라 정통성에 대해서는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어린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무난히 조정을 이끌어 불안한 측면은 곧 해소되었고 선조의 아버지는 덕흥대원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1년만에 그쳤습니다.

 

선조는 연산군과 중종의 통치기간동안의 정치부패 이후 국가 재건 뿐만 아니라 서민생활 개선에 주력했습니다. 연산군과 중종때까지 1498년부터 1545년 4번에 걸친 사화(문인숙청)으로 자리잡은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사림 학자들을 격려하고 등용하는데 명종의 정치개혁을 이어가 이황, 이이, 정철, 유성룡 등 많은 유학자들을 등용했습니다.

 

선조는 또한 인재 등용의 문을 개혁했습니다. 지난 시험들은 주로 정치나 역사가 아닌 문학에 관한것이었으나 선조는 다른 주제의 중요성을 부곽시켜 제도를 개혁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사화를 당하고 역적으로 몰린 선비들을 거의 사면하고 그 후손들 중에서도 인물을 뽑기도 했고 중종 숙청을 선동했던 부패한 관료들과 비리를 저지르던 관료들은 끝까지 찾아내 처리했습니다. 이런 행동으로 일반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짧은 시간이지만 평화의 시대를 누렸습니다.

 

선조가 궁궐로 부른 인물중에는 심의겸과 김효원이 있었습니다. 심의겸은 보수적인 인물이며 인순왕후의 친척이었습니다.김효원은 진보적인 개혁을 주장한 새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선조를 지지하는 무리들은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두 파벌로 분열되기 시작하는데 훗날 이들을 붕당정치의 시초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은 같은 지역에 있는경우도 있었지만 심의겸은 서쪽, 김효원은 동쪽에 대부분 거주하고 있어 서인과 동인으로 불렸고 이 파벌의 정치체제는 이후 200년간 이어졌고 조선왕조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초기에 심의겸은 인순왕후와 관계가 있었고 부유층으로부터 더 큰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서인들은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개혁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심의겸의 우유부단함이 동인의 진출을 도와주었고서인들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인들은 자신들의 영향을 받은 첫번째 시기에는 가속화되었지만 그후 많은 동인 무리들이 개혁을 늦추도록 스스로 만들었고 자신들 안에서 또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유성룡은 남인을 이끌고 북인과 논쟁을 벌인 끝에 북인들은 계속 분열하였고 북인은 또다시 그안에서 소북과 대북으로 분열하였습니다.

 

군대의 규모도 개혁 과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정치적 분열이 나라를 계속 약화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광조의 학문적 후계자였던 이이는 미래의 여진족과 와구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의 규모를 늘려야한다고 선조에게 얘기했으나 동인과 서인은 이이의 제안을 거부했고 많은 사람들이 평화가 계속될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군대의 규모는 전보다 더 축소 되었습니다. 왜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아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자 7년전쟁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중국에서는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은 모두다 조선의 황폐화로 이어졌습니다.

 

선조는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예야스와 남쪽에서 전쟁을 하면서도 북으로도 무장을 파견하는 등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에 더 큰 위협이 되었고 많은 백성들은 조선이 일본에 점령될까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궁내의 관료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조사하는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여 사절단을 파견하도록 선조에게 요청했지만 동인과 서인 두 파벌은 정말 중요한 이문제에 대해서는 합의 할 생각이 없었던것 같았었으나 타협은 이루어졌고 각 파벌에서 대표로 1명씩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일본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갖고 귀국했을때 그들의 보고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논쟁과 혼란을 야기했을뿐이었습니다. 서인의 황윤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더 많은 병력을 증원하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동인의 김성일이 이들의 대규모 병력은 조선과의 전쟁때문이 아니다라고 보고한것은 그도 조선의 무법상태에서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적떼들을 토벌하기 위해 서둘러 그들의 개혁을 완료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동인들이 궁궐에서 더 큰 우위를 갖고있었기 때문에 선조에게 전해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태도는 아시아 정복에 대한 관심이 분명히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황윤길의 보고는 무시되었고 선조는 전쟁준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591년 사신이 일본에서 귀국한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국 사신들을 파견하여 선조에게 조선을 통과하여 중국을 침략하기위해 길을 내어달라는 식의 사실상 조선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선조는 일본의 요청을 거절한 뒤 중국에 편지를 보내 일본이 한중동맹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또한 해안지역에 성을 쌓도록 하고 신립장군과 이일장군을 남애로 파견하여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조선이 준비에 바쁜동안 일본은 많은 조총과 전국 각지에서 병사를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지휘아래에 일본선 약 700척이 조선에 침입했습니다. 고니시는 아주 쉽게 부산성과 동래성을 불태우고 수군대장인 정발과 동래부사였던 송상현을 격파하고 북진했습니다. 다음날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더 많은 부대가 상륙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도토 다카도라와 구키 요시타카 가 이끄는 거대한 일본 수군이 그들을 바다에서 지원했습니다. 이일 장군은 상주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여 충주로 후퇴하게되고 그곳에서 신립장군을 만났으나 충주 전투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선조는 김명원 장군을 총사령관과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수도 방위를 명했습니다. 그 후 일본이 수도를 점령하기 시작한 직후 왕은 평양으로 도주했고 나중에 평양이 함락되기 직전에 또다시 북쪽 국경 근처인 의주로 도주하였습니다. 선조가 한양을 비운사이 왕실에 희망을 잃은 많은 백성들이 궁궐을 약탈하고 많은 공공건물을 불태우게 되는데 이는 왜구가 도시를 점령한 후 저지른 피해보다 더 컸습니다.

 

조선육군는 계속된 전투에서 병력을 잃었지만 조선수군은 해상에서 일본의 보급선을 끊는데 성공했고 이순신장군은 일본수군을 여러차례 격파해 육지의 병력에게 가는 보급에 많은 피해를 끼쳤습니다. 청나라의 병력이 도착하고 조선의 수군이 보급을 저지하자 왜구는 남쪽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평양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코니시 유키나가는 벽제관 전투에서 청나라의 진격을 막고 다시 북쪽으로 군대를 밀어올리려 했으나 결정적인 타격은 항주전투에서 권율 장군이 훨씬 적은 병력으로 왜구를 격파한데 있었습니다. 그 후 일본은 평화협상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 즈음에 양측은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피난가 있던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오기 한달전 한글로 칙령을 내리는데, 그 내용은 왜구를 포로로 잡거나 왜구의 이동상황을 보고하고 조선인 포로를 구출하면 신분에 상관없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구와 협상기간동안 조선은 한양을 탈환했지만 궁궐은 전소되었고 선조는 옛 왕실의 궁을 수리하여 덕수궁으로 개칭하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협상은 양측의 이해부족과 조선의 잘못된 정보로 인해서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1597년 왜구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세나라 모두 전쟁준비가 되어있어 1차 임진왜란처럼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은 육로와 바닷길 양쪽을 이용해 한양으로 진격했고 처음에는 도도 다카도라가 칠천량전투에서 원균에게 승리하면서 순조롭게 전쟁이 진행되는것으로 보였지만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단 13척의 조선 수군에게 명량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목표는 좌절되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맞물려 이 전투는 사실상 전쟁을 종결시켰고, 1598년 왜구는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노량해전은 고니시유키나가가 이끄는 마지막 왜구가 조선을 도망가면서 벌어진 전투로 사실 이전투를 끝으로 임진왜란은 끝났음을 의미했습니다. 

 

죽음

모진풍파를 겪었던 선조는 1608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목릉에 이장되었다.

 

뒷 이야기

선조가 전쟁 중 실시한 군사훈련시설 건설과 조세법 개정 등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폐허와 굶주린 사람들을 남겼습니다. 전쟁 중 자신은 도망가는 와중에도 광해군이 대신 현장에서 통치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 다시 실권을 잡는 등 책임감이 부족하고 이기심이 많은 왕이기도 했지만, 다른 평가로는 이기적인 인격이 나라의 부흥을 준비하는 합리적인 모습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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