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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예종과 성종

by 붕스 2023. 9. 12.

예종

예종(1450년 1월 23일 ~ 1470년 1월 9일)은 1468년에 19세때 아버지 세조의 뒤를 이었으나 몸이 좋지않아 1년만에 사망하게 되는 조선의 8대 왕입니다.

 

성종과 정현왕후가 계신 선릉

 

재위 중 가장 두드러진 사건 중 하나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것으로 유명한 남이 장군의 재판과 죽음이었습니다. 남이장군은 1468년 예종의 즉위년에 28세때 병조판서에 임명되는데 남이를 질투한 유자광은 예종이 남이장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그를 역모죄로 고발했습니다. 또한 남이장군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진압했던 강순장군까지 끌여들여 그들은 역모죄로 처형되고 유자광은 고위직으로 올라게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 유자광은 자신보다 권력이 위에있는 자들을 고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생

1450년 수양대군과 그 첫번째 부인인 정희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는데 첫째였던 의경세자가 병으로 요절하게 되어 7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1468년에 세조가 퇴위하고 왕위를 이어받게 되지만 아직 스무살도 안되고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서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치적인 결단은 정희왕후와 세조때의 신하들이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은 불과 14개월이지만 사건들이 몇가지 있었는데, 1468년 남이장군의 역모죄는 조정의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유자광의 모함으로 알려져있기는 하지만 남이장군이 역모에 가담했는지는 밝혀진바가 없었습니다. 1469년 그가 사망하기 전 조선은 일본과의 무역을 전면 금지하였고 일반농민들에게 군대에 속한 땅을 경작할 권리를 주기도 했습니다.

 

예종이 사망한 후 왕위는 아들에게 계승되지않고 장인인 한명회라는 큰 지원과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지목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된 조카이자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잘산대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후에 성종이 알려져있습니다.

예종의 두 아들 인성대군과 제안대군은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습니다.

 

예종은 20살 생일 직전에 사망하였고 둘째부인인 안순왕후와 함께 경기 고양시에 현재 창릉으로 알려진곳에 묻혔습니다.

 

 

성종

성종(1457년 8월 19일 ~ 1495년 1월 20일)은 잘산대군으로 예종의 뒤를 잇는 조선시대의 9대 왕입니다.

 

일생

이혈은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태어난지 몇달만에 사망하게 되고 1461년 자산군으로 명해졌고 1468년에 잘산군으로 바뀌었습니다.

 

1467년 한명회의 막내딸인 한송이와 결혼하는데 한송이의 형제 중 한명은 예종의 첫번째 부인인 장순왕후였습니다.

 

예종의 친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 의경세자의 아들인 이혈은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즉위 후 의경세자는 덕종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어머니는 인수대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종이 즉위했을때 고작 12세였기 때문에 정희왕후와 소혜왕후와 함께 통치하였습니다. 1476년 7년 후인 19세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1474년 첫째부인이 사망하자 성종은 후궁들 중 한명인 함안 윤씨를 왕비로 승격시키기로 했습니다.

 

태종과 세종, 세조가 정한 법에 따라 성종의 통치는 경제의 번영과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1474년 할아버지인 세조가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시행했습니다.

 

왕실도서관과 연구소를 겸하는 왕의 자문위원회인 홍문관을 대폭 확대하고 왕실의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강화하였습니다. 세종대왕 이후 처음으로 사대부의 정치적 견해가 충돌한 학자들이 나오게 되었고 성종은 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물을 임명함으로써 통치를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었고 성종의 정책은 긍정적인 혁신을 가져왔고 그의 세력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성종 자신도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으며 보다 자유주의적인 학자들과 개선할 점에 대해 논쟁하기를 즐겼고 지리와 예절에 관한 많은 책을 출판하여 백성들에게 유익한 도움이 되는것을 바랬습니다.

 

1477년 과부 재가 금지법을 끝까지 통과시켜 여성의 재혼에 대해서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던 성종은 경국대전에 재혼금지를 명시하여 법으로 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까지 적용이 되었으나 일반 백성들은 크게 영향이 없었습니다.

 

1491년 성종은 다른 선대와 마찬가지로 북방의 여진족을 소탕하고 남방의 일본과의 무역을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성종의 명성은 중국이나 일본에게도 크게 퍼져나갔습니다. 일례로 성종이 사망하게 되자 왜관을 오가던 일본인이 크게 통곡할 정도였고 중국의 사신이 성종과 얘기한 후 깊이 흠모했다는 얘기도 알려져있습니다.

 

1495년 1월에 성종은 사망했고 서울시 강남구 삼송동에 부인 정현왕후와 함께 안장되고 후에 선릉으로 알려지게 되며, 후사는 성종의 아들 이영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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