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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중종

by 붕스 2023. 9. 12.

중종(1488년 4월 25일 ~ 1544년 12월 9일)은 1506년 9월 역모로 반란이 일어나게 된날, 역모의 주모자들 중 일부 무리가 진성대군의 집을 포위하자 역모가 있는지 몰랐던 그는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생각에 자살을 시도하려하나 신수근의 딸이며 현명했던 그의 부인 단경왕후의 만류에 주모자들을 만나고 죽이려는게 아니라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하여 왕이에 오르게 되니 조선의 1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중종이 후에 성종이 계신곳으로 옮겨진 선정릉

 

조정내의 권력자

중종은 성균관과 삼사를 재개하여 연산군 시대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초기에는 왕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었고 그를 왕위에 올린 세력들이 조정을 장악하고있었습니다. 이후 8년간 반정을 일으켰던 3명이 노환과 자연사로 사망하게 되자 1506년 반정에 참여한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조광조는 향약이라는 자치제도를 구축하고 유교문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하고 토지를 보다 평등하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조광조는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노비를 포함한 유능한 사람들이 관리로 임명되어야한다는 생각으로 정부의 인재를 채용하기 위한 보안제도를 도입했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가 감찰관 시절에는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들이 없도록 엄격하게 법을 집행했다고 하였습니다.

 

중종과 조광조는 개혁노선에 공통된 열정을 갖고있었지만, 중종은 주로 왕권을 굳히는데 관심이 있었고 조광조는 성리학에 더 관심이 있어 공통된 노선은 맞았지만 조광조의 타협하지 않는 성격과 잦은 간언도 중종과의 갈등이 조금씩 생기게 되었습니다.

 

1519년 말 훈구파였던 남곤, 심정 등은 중종과 대립하고 있던 조광조의 영향력을 더 약화시길 계획을 세우고 꿀을 사용하여 뽕잎에 '주초위왕'이라고 발라 벌레가 꿀이 있는곳으로 먹게하였습니다. 한자의 '주'와 '초'를 합치면 '조'자를 형성하고 이는 '조광조가 왕이된다'라는 표현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말에 일어난 비슷한 사건을 연상시키게 되는데 '목자득국'이라는 말로 이는 '목'과 '자'를 합치면 '이'자가 되어 이성계의 '이'씨가 되는 모양새입니다.

 

1506년 중종반정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홍경주는 이사건을 이용해 중종의 의혹과 공포를 고조시켰습니다. 마침내 1520년 조광조는 파벌을 형성했다는 죄로 처형되고 그를 추종하던 세력이 대거 유배되면서 그의 급진적인 개혁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3차 문인숙청'으로 알려졌고 '기묘사화'라 불렸습니다.

 

조광조가 처형되고 난 후 중종은 자신이 혼자 통치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의 치세는 도로 권신들이 주도를 하게 되고 또다시 권신들 안에서 후궁 경빈 박씨의 세력, 두번째 부인이었던 문정왕후의 본가 세력등 다양한 보수파 파벌간의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524년 남곤과 심정은 후궁 경빈박씨와 함께 세자의 후견세력이었던 김안로를 몰아냈으나 김안로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작서의 변'으로 경빈박씨와 그의 아들인 복성군을 처형되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안로는 태자의 비호를 빌미로 상대파벌에 보복정치를 시작했고 중종의 셋째부인인 문정왕후가 아들을 출산한 후에 그녀를 폐위시키려고도 하였습니다. 김원로는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임과 윤원형에게 탁핵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하여 고 장경왕후의 오빠이자 김안로의 측근이었던 윤임은 그 지위를 유지하며 조카(후에 인종)를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 권신들은 두개의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모였고 각각은 별개의 정치적인 파벌로 이어졌습니다. 윤임파는 '대윤', 윤원형과 윤원로 파는 '소윤'으로 나뉘어 득세했고 이들의 갈등은 중종 사후 '제4차 문인숙청'으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왕권이 약화되자 선대 왕들에의해 쫓겨났었던 외세들이 더 큰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세종과 세조때 평정되었던 여진족이 북쪽에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괴롭혔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는데 그 중 가장 큰 규모가 삼포왜란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종은 중종반정 초기에는 우유부단하고 변덕이 심한, 나약한 군주의 인상이 강했지만 나중에는 왕권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려했던 왕이었습니다. 초창기에 조광조를 밀어주다 폐하고 남곤에게 의지했다가 또다시 내치고 김안로에게까지 힘을 실어주었다가 결국엔 삭탈관직하고 사사시키는것만 보아도 중종이 얼마나 변덕이 심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도 신하들의 눈치를 보았으니 정책조차도 과감하게 추진을 못했고 왕이었던 자신의 자리만 지키기에 모든 힘을 쏟았다는것도 문제점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중종은 자신은 검소하였고역사적으로도 중종 생전과 생후에 평이 엇갈렸으니 후대에도 중종의 평은 다양하였고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죽음

1544년 11월 29일 사망하여 경기도 고양시에 안장되었었는데 추후 부모였던 성종과 정현왕후의 묘역인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으로 옮겨졌고 이 두 묘역을 합쳐 현재는 선정릉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왕위는 장경왕후의 장남인 이호(인종)에게 연계되었으나 1년도 채 되지않고 사망하게 되어 문정왕후의 아들로 이복동생인 경원대군(후 명종)으로 계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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