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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인조

by 붕스 2023. 9. 14.

인조(1595년 12월 7일 ~ 1649년 6월 17일)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장남으로 태어난 조선 16대 왕입니다. 여진족의 조선침공 때 왕이 되었고 여진족은 모든 조건을 만족한 뒤 조선에서 철수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계속해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지속하자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고 1636년 인조가 항복하고 왕자를 인질로 보내주는 등 비굴한 합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인조와 인열왕후의 합장릉인 장릉

 

이종(인조)은 재위기간동안 여러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 경제적으로 불황이었기때문에 무능하고 약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일생

인조는 1595년 정원군의 아들로 출생했고 1607년 능양군으로 책봉되었습니다. 당시 정치를 장악하던 어떠한 파벌의 지지도 없이 왕실의 일원으로 지내고있었습니다.

 

1608년 선조가 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나 당시의 왕궁은 여러 파벌로 분열되어있었고 선조 말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북인은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였고, 남인은 보다 온건한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선조 사후 당시 정권을 잡은 북인은 또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고 광해군을 지지했던 북인이 궁궐의 주요 세력이 되었고, 서인들은 집권에 실패하고 소수파로 남아있었지만 많은 서인들은 다시 세력을 잡으려는 기회를 찾았습니다.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쳤고, 국내정치도 못지않게 잘 했지만 장자가 아닌 첩의 자식이라는 신분이였기 때문에 많은 정치인과 학자, 양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북은 소북을 탄압하고 선조의 장남 임해군과 왕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살해했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는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소수파들의 인물을 등용하려하였지만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 인물들의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 행동으로 광해군은 관료들과 양반들에게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광해군에 해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623년 서인의 최명기, 김류, 이귀, 이괄 등이 반란을 일으켜(인조반정) 광해군을 폐위시켜 제주도로 유배했고 정인홍, 이이첨이 살해되며 서인들이 대북을 몰아내고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서인들은 인조를 궁으로 데려와 새로운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인조는 왕이 되긴 했지만,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이 거의 모든 정권을 잡고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권위조차 없었습니다.

 

이괄은 반정에서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생각만큼의 보상은 없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624년 그는 확대되는 만주족과 싸우기 위해 평양군의 사령관으로 파견된 후 인조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인조반정의 다른 중요인물들은 높은 관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괄은  12000명의 병력을 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해 장만장군의 휘하의 관군을 격파하고 한성을 포위하자 인조는 공주로 도망치고 한성은 이괄의 군대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624년 2월 11일 이괄은 흥안군을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켰으나 장만 장군은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이괄의 군대를 격파하고 한성을 탈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괄이 자신의 병사에게 살해되어 반란은 종결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의 재건으로 조금씩 회복하던 경제가 다시 무너지고 조선은 그 후 더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은 명나라와 성장하고 있는 여진족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퇴위된 후 서인들은 명나라와 동맹을 유지하고 여진족 후금에 강경한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때까지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후금은 조선을 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은 만주로 도망쳐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김으로써 후금과 조선의 우호관계는 끝이났습니다.

 

1627년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의 둘째아들인 아민 장군과 강홍립 장군 등 기병 3만명이 조선에 침략해 광해군 복원과 김자점을 비롯한 서인 지도자의 처형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장만 장군은 다시 후금과 싸웠지만 패할 수 밖에 없었고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도망쳐야했습니다. 한편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돌아가기로 해 평화가 정착되었습니다.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로 선포되었고 후금은 조선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은 후금에 강경한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 호의를 갖고있던 누르하치는 다시 조선을 침공하지는 않았지만 누르하치가 죽고 청 태종으로 알려진 홍타이지가 그 뒤를 이은 후금은 다시 전쟁의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조는 후금에서 도망쳐 조선으로 온 명나라 모문룡장군과 그의 부대에게 피난처를 제고했는데 이것이 후금이 다시 조선을 침공하게 한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을 청나라라 칭하고 직접 조선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청군은 당시 의주성을 지키던 조선군 명장이었던 임경업장군과의 전투는 피하고 12만 8천여명의 청군은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가기 전에 한성으로 내달려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청나라가 모든 보급을 끊은 뒤 식량과 물자가 바닥난 인조는 마침내 청나라에게 항복하였고, 신하의 자격으로 청 태종에게 9번을 절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고 인조의 첫째아들과 둘째아들을 청나라 포로로 보내는 삼전도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청나라는 1644년에 중원을 정복했습니다.

 

1644년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뒤 두 왕자들은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인조의 첫째아들인 소현세자는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의 신문물을 가져와 인조에게 개혁할 것을 건의하나 보수적인 인조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천주교와 서양과학을 가져오려했다는 이유로 소현세자를 박해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방에서 머리에 심한 피를 흘려 죽어있는것이 발견되는데 야사에서는 인조가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들여온 먹판으로 아들을 때려 숨지게 했다라고 알려져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사후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생겨 몸기 빠르게 부패했다는 점을 들어 독살이 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의 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일들을 밝히려 했지만 인조는 즉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식의 규모를 크게 축소했으며 장례기간을 단축하기도 했습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인 경선군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순서로는 경선군이 왕이 되어야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 정치싸움에 휘말려 동생들과 제주도로 쫓겨나게 되고 소현세자의 세자빈을 반역죄로 처형하라고 명했습니다.

 

죽음과 평가

인조는 주로 약소하고 우유부단하며 불안정한 통치를 한 임금으로 현대에는 알려져있습니다. 이유는 이괄의 난과 두번의 호란을 겪었고 또한 경제를 파탄의 지경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폐위된 광해군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고 인조는 재위기간동안 거의 성과가 없었지만 1592년부터 1636년까지 여러차례의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비하여 군대를 개혁하고 국방력을 강화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인조는 1649년에 사망하였고 경기도 파주시 탄현에 있는 장릉에 인열왕후와 함께 묻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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