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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현종과 숙종

by 붕스 2023. 9. 19.

현종

현종(1641년 3월 14일 ~ 1674년 9월 17일)은 조선의 18대왕으로 통치기간동안 특히 장례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에 대해 국내 파벌 간에 격렬한 대립이 특징이었습니다. 

 

현종과 명성왕후가 모셔진 동구릉 내의 숭릉
현종과 명성왕후가 모셔진 동구릉 내의 숭릉

 

일생

현종(이연)은 1641년 효종의 장남으로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기 전 심양에서 봉림대군이 청나라 포로로 중국에 있을때 태어났고 1645년 봉림대군과 함께 귀국하여 1651년에 세자가 되었습니다.

 

예송논쟁은 효종의 장례를 둘러싼 갈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아들 현종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서인과 남인은 인조의 둘째 부인이었던 장렬왕후가 유교 장례형식에 따라 장례복을 언제까지 입어야하는지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서인은 1년만 입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남인과 그 대표격인 허적은 3년의 기간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실제로 가계를 이는 둘째 아들이 사망했을때 유교 장례법에 대한 이전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서인들은 둘째 의붓아들이 사망했을때의 관습에 따르기를 원했지만 남인은 효종이 실제로 인조의 뒤를 이은 후 왕조을 이어왔기때문에 3년동안 장례를 치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젊은 현종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는 서인들의 주장을 들어 1년의 기간을 강제하기로 선택했으나 동시에 현종은 서인들의 세력이 커져 왕권을 위협하는것을 막기 위해 허적을 영의정에서 해임하지 않았습니다. 장례문제로 남인과 서인들의 불화가 심해졌고 이에 앞서 1623년 대북이 축소된 후 효종의 주도로 서인과 남인은 정치적 동맹을 맺었었지만 장례문제에서 양측 모두 대립하는 입장이라 앞으로 더 큰 갈등의 가능성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종은 처음에 서인의 1년이라는 기간으로 타협하고 남인의 허적을 영의정으로 두어 양쪽의 균형을 유지하며 이로인해 두 세력은 일시적으로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674년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장례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남인들은 장렬왕후가 1년의 기간동안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고 서인들은 9개월의 기간만 입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현종은 서인들과 송시열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것같아 이번에는 남인의 말을 듣고 1년의 기간을 선택하여 서인들보다 남인들이 주요 정치세력이 되었습니다. 예송논쟁은 1675년 현종이 사망한 후에도 계속되어 현종의 다음 왕이었던 숙종이 이문제에 관한 모든 논쟁을 금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현종시대의 역사출판에도 영향을 미쳐 처음에는 주로 남인들이 썼다가 나중에는 서인의 역가가들이 수정했습니다.

 

1666년 현종때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13년 넘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선을 떠났습니다.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조선왕조와 조선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을 써 많은 유럽인들에게 조선을 알렸습니다.

 

1670년 ~ 1671년 조선은 추위화 흉년으로 인한 파괴적인 기근(경신기근)을 견뎌냈습니다. 사망자는 여전히 측정하기 어렵지만 수십만명의 조선인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음

현종은 임진왜란과 두번의 호란으로 황폐해진 효종의 군사확장과 국가 재건을 계속 이어갔습니다.또한 천문학과 인쇄를 장려하고 동성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등 치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습니다.

 

1674년에 사망하고 아들 숙종이 뒤를 이었으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숭릉에 아내인 명성왕후와 나란히 묻혔습니다.

 

 

숙종

숙종(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은 조선의 19대 왕입니다. 여전했던 파벌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간의 세력을 조절하여 통치기간동안 다양한 정치권력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일생

숙종(이순)은 1661년 10월 7일 경희궁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67년 6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674년 13세의 나이로 19대 왕이 되었습니다.

 

숙종은 훌륭한 정치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가장 치열한 파벌 싸움이 있었습니다. 왕권강화를 위해 파벌을 교체하며 세력을 조절했습니다. 환국이라고 불리던 세력교체 때마다 말 그대로 나라가 변화했고 패배한 세력은 처형과 망명으로 정치에서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큰 사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운 정권 교체는 일반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숙종의 통치는 더 번영했던 시대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숙종 초기 인순왕후의 상중 기간에 관한 사소한 문제인 왕실 장례 분쟁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충돌했습니다. 남인은 1년 서인은 9개월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주장했습니다. 1년의 상복입는 기간은 조선 효종을 장남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9개월의 기간은 양반의 규율에 따라 효종을 장남으로 인정하지 않는것임을 시사하는것입니다. 즉 서인은 왕실을 별도의 규칙이 적용되는 별도의 계급이 아니라 양반계급의 첫번째라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야만적인 나라로 보던 청나라와의 전쟁을 놓고도 두 파벌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허적과 윤휴가 이끄는 남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지지했고, 서인은 먼저 국내 정세 개선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숙종은 처음에는 남인의 편에 있었으나 1680년 서인으로 부터 허적이 역적으로 고발되었고 이로인해 허적과 윤휴가 처형되고 남인이 숙정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고 불립니다. 한때 서인의 파벌은 송시열이 이끄는 노론과 윤증이 이끄는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9년간 집권한 후 숙종이 서인의 지지를 받았던 민비(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장씨를 새로운 왕비로 추대하면서 노론은 붕괴되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미모는 실록에서도 기재되어있습니다. 서인은 희빈장씨의 아들을 왕세자로 추대하는것을 반대하여 숙종을 화나게 했고 희빈장씨와 그 아들을 지지했던 남인은 권력을 되찾아 서인을 몰아내고 송시열을 복수하기 위해 처형합니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라고 불리고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 1694년 남인이 폐위된 왕비를 복위시키려 공모했다며 서인을 다시 숙청할 계획을 세우자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킨것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남인의 서인 숙청에 화가나 갑자기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을 다시 세력에 앉혔습니다. 남인은 이 타격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갑술환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숙종은 희빈장씨를 폐비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켰습니다. 희빈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사약이 내려져 죽게 되었습니다. 소론은 희빈장씨의 아들 이윤세자를, 노론은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궁(이금)을 지지했고 후에 연잉궁이 영조가 됩니다. 고 인현왕후와 새로 즉위한 인원왕후는 모두 자식이 없었습니다.

 

1718년 숙종은 곧 조선의 경종이 되는 왕세자에게 섭정으로 통치를 허가했습니다. 숙종은 1720년 이이명에게 경종의 후계자로 연잉궁을 올리라고 지시한뒤 역사학자나 기록가 없이 사망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로 인해 1721년에 4명의 노론의 인물이 처형되었고 1722년에는 노론의 8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죽음

숙종의 업적으로는 세제개혁, 새로운 화폐, 화폐제도의 창설, 첩의 자녀와 중산층의 자녀를 지방정부 고위층으로 승진시키는 공무원제도의 자유화 등이 있습니다.

 

1712년 중국 청나라와 협력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습니다. 일본은 1696년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습니다.(한국정부는 독도도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나 일본은 동의하지 않고있습니다.)

 

숙종의 치세는 오지에서의 농업발전과 출판과 문화활동이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1720년 46년간 통치한 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의 명릉에 인현왕후와 나란히 묻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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