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는 조선시대 22대 왕으로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인 영조의 섭정을 맡았고 1776년 4월 27일부터 1800년 8월 18일까지 왕으로 재위했스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뒤를 이어 나라를 개혁하고 개선하려는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일생
영조에 의해 정조가 11세때 뒤주에서 사망했던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의 아들이고 형인 의소세손은 3살에 사망하였습니다. 어머니였던 혜경궁홍씨의 회고록은 영조, 정조, 순조 때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는 오랜 갈등과 정신적인 병때문에 영조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집권하고 있던 노론을 반대하고 정파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8년 후 이산(후 정조)은 사도세자의 거처를 방문하고자 청하였지만 영조는 거절하였고 그런이유로 그는 사도세자의 장례식에 참석하는것을 거부하였습니다. 1764년 2월 21일 이산은 영조의 명으로 효장세자와 효순왕후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노론은 이산이 미치광이의 아들이며 죄수의 아들이라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으로 후계자의 정당성에 항의했고 이는 영조에게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1762년부터 1777년까지 노론의 일부는 사도세자와의 예전 관계가 있어 정조를 퇴위시키고 이복형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삼촌 홍인한과 화안옹주의 양자인 정후겸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정조는 세자시절 정조의 즉위를 강력히 지지하고 왕권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홍국영을 만났었지만 그는 권력욕때문에 쫓겨나게 되고 또다른 노론의 일원이었지만 김종수가 정조의 조력자로 남아있었습니다.
영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775년 정조는 섭정을 하게 되었지만 영조는 군사력은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1776년 영조가 사망하기 전 경희궁에서 왕으로 즉위하게 되고 그 후 배우자를 선택하고 신하들에게 가장 먼저 한말은 자신은 선왕인 영조에게 처형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것이었습니다.
정조의 재위 2년째에 가뭄이 크게 왔습니다. 가뭄이 들자 정조는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그들을 위해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백성들과 공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홍역의 유행이 계속되는 것에 깊이 우려하고 있었으며 사망률을 억제하기 위해 의약품을 무상으로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파벌을 걱정하면서도 그들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속 이어나갔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자들을 없애려고도 하였습니다.
정조는 즉위 첫날부터 아버지의 오명을 씻기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화성을 지었고 이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있습니다.
정조는 항상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일부로부터 위협을 받고있었으나 홍국영 등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776년 홍상범 등 노론의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조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했고 정조는 궁궐에 숨어있던 역모자들과 싸워 직접 체포했습니다 홍상범, 홍계능 등 노론의 일부를 처형하였고 은전군과 홍인한, 정후겸을 처형했습니다.
1785년 왕의 호위로 장용영을 설치하였고 1782년부터 장용영 부대에 징집하기 위한 장교를 선발하기 시작하여 1407년 태종이 만든 내금위를 대신하였습니다.
정조는 조선의 부흥을 주도했지만 처음에는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가기 급급했고 나라 전체의 정치를 통제하고 나아가 국가의 진보와 발전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재위기간동안 다양한 개혁을 단행했고 특히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립하였습니다. 규장각의 목적은 조선의 문화적, 정치적 입지를 개선하고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될 인물들을 모집하는것이었습니다. 정조는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 많은 실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의 치세에는 조선의 대중문화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정조는 견제와 균형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력한 세력을 갖고있는 노론보다는 소론과 남인들을 더 우대했습니다.
정조는 1791년 영의정인 채제공으로부터 백성들이 노동의 결실을 팔며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보고를 받게되었고 정조는 신해통공을 제정하여 시전상인들만의 특정 상권행위를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로써 이 권리를 수도 내 상인집단에게만 유보했던 금난전권은 폐지 되었습니다.
죽음
정조는 둘째 아들이자 세자인 순조가 김조순의 딸과 혼인을 하게 하였으나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 바람에 식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1800년 정조는 47세 때 아들인 순조에게서 자신의 평생 업적이 결실을 맺는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그의 죽음 뒤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고 또한 그것을 다룬 책도 많이 있고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추측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조는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와 함께 경기도 화성시 건릉에 묻여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