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1852년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은 조선의 26대 왕으로 1864년부터 1907년까지 43년간 조선의 마지막 왕이며 1897년부터 1907년 강제 퇴위할 때까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연호가 광무였기때문에 광무황제라고도 불립니다.
고종은 조선 말년의 대부분을 통치했고 1895년까지 총명하고 강력하며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민비(명성황후)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통치 할 수 있었습니다.
고종(이명복)은 1863년 12월 13일에 12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니 신정왕후가 고종 3년(1866년)까지 수렴청정을 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고종의 친정은 이때부터지만 여흥부대부인과 흥선대원군이 1874년까지 상왕으로 군림하고 섭정을 했기 때문에 고종의 친정은 한참 뒤에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꾸준하게 펼쳤고 대조적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급속히 근대화되었습니다. 1876년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개방하고 수십 년에 걸쳐 조선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조선은 매우 불안정했고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189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 1895년 동학농민운동, 1895년 민비시해사건이 고종의 재위 기간 동안 발생했고 이 사건들은 모두 외세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동안 고종은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력을 강화하고 외세의 지원을 받아 근대화를 꾀한적도 있습니다. 그는 광무개혁을 통해 군, 산업, 교육을 향상시키려 했고 어느정도의 성공은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처음에는 조선의 지식인들 중 일부, 특히 독립협회(고종이 처음에는 용인했으나 1898년 폐지)에서 불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1894년 ~ 1895년 제 1차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후 청나라는 수세기동안 유지했다고 믿었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습니다. 고종은 1897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이후 독립을 선포하여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종의 행동은 일본의 분노를 샀고 1904년 ~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동아시아의 유일한 강국이 되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시키려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고종은 1907년 7월 20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어 그의 아들인 순종이 즉위하게 되었고 고종은 덕수궁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해외로 망명하여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게 되었고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왕실은 일본에 흡수되었습니다.
고종은 1919년 궁궐에서 죽었지만 당시 상황은 여전히 의문이 많이 있는데 고종이 일본에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의 죽음은 후에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직접적인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일생
-조선
이명복(고종)은 1852년 7월 25일 한성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하고 흥선군과 신정왕후의 배경으로 고 익종과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이 되어 즉위하기 전 익성군으로 봉해졌고 12월 9일 궁궐에 들어오게 되어 그의 부모는 왕족으로 대우받게 되었습니다.
1963년 12월 13일 이명복은 창덕궁에서 즉위하였고 불과 12살때의 일이었습니다. 신정왕후는 고종이 15세가 되는 해까지 섭정을 했고 1866년 3월에 민치록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할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였으며 1860년대 중반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쳤고 각각 1866년과 1871년 프랑스와 미국의 조선침략으로 이어졌고 외국 가톨릭 교도들의 박해도 가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 초기에는 역대 왕들도 시도하지 못했었던 소실된 경복궁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서원과 안동김씨가 휘두르던 권력이 해체되기도 했습니다.
1873년 고종은 친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의 퇴임으로 고종의 배우자인 민비와 여흥민씨가 궁궐을 장악하면서 권력의 요직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군사기술을 익힌 일본은 물고기, 철광석, 기타 천연자원을 찾기위해 조선을 침략했고 강화도에서 조선군에게 승리하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고종이 일제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과 외국간에 체결된 최소의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에 있는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하고 부산, 인천, 원산 등 3개의 항구를 일본과 해외무역에 개방하도록 강요했고 이러한 일방적인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제국주의 세력의 쉬운 먹잇감이 되었고 일본의 조선합병의 길을 열었습니다.
고종은 소총을 장비한 병사들의 새로운 별기군에 의존하기 시작했는데 이 들은 개화당이 요청한 군대였고 이들과 달리 훈국병은 13개월동안 월급도 받지 못했고 한참 뒤에 한달치의 월급을 받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훈국병은 폭동을 일으켜 켰고 다시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는 청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1882년 6월 27일 약 3000여명의 병사가 한양에 배치되었고 7월 7일 이들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게 되며 다시 민씨 일가가 권력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84년 12월 4일 5명의 개화당파들이 고종과 민비를 구속하는 반란을 일으켜 조선에서 청군을 몰아내려하였으나 이 반란은 3일만에 실패했고 김옥균을 비롯한 주동자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처형당했습니다. 이를 갑신정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주민의 대부분은 기아가 만연하게 되어 황폐한 도로를 따라 늘어선 오두막에 살고 있었고 빈곤과 기근, 과도한 세금, 지배세력들의 부패 등의 문제들은 19세기에 많은 농민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반정부, 반양반, 외국인 배척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민비가 실시한 조세제도였고 고종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의 협력을 구했습니다. 영선군 이준용 등은 농민들과 협력하여 고종을 암살하고 직접 왕위에 오르려고 하였지만 이 음모는 누설되어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1894년의 가장 큰 개혁 중 하나는 노비제도를 폐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895년 민비는 일본 무사들에 의해 암살되는데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공사가 꾸몄던 일인데 일제에 동조하는 병사가 경비하는 경복궁에 일본 무리들이 들어갔고 민비는 궁에서 살해당하게 되었습니다.
1895년 일본은 1차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고 갑오개혁과 민비시해사건은 조선 내에 반일감정을 부추겼습니다. 고종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키워 1884년 저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동맹국으로서 러시아에 많은 사절을 보냈습니다.
농민뿐만 아니라 일부 유학자들도 조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60여개의 의병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동학농민운동 이후 다양하게 조선 독립운동이 계승되었습니다.
친일 정권은 더욱 커졌고 반일 정치인들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살해되거나 도망쳤고 고종은 피난의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세자는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동안 통치했습니다. 이를 현재 아관파천이라 부르고있습니다.(아관망명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는데 아관파천은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 친일파들이나 일본에서 부르는명칭이고 정확하게 아관망명이 맞다는 추세로 바뀌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선포
1897년 10월 13일 고종이 새로 지은 환구단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했고 국호도 대한제국으로 변경했고 새 원호인 광무를 선포했습니다. 이는 청나라에게 조선에 대한 종주국의 종언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고 같은날 고종은 순종을 황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899년 8월 17일 고종황제는 대한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자신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주었으나 여전히 입헌군주제로 변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화당과 독립협회가 제안한것에 논의를 했으나 그의 개혁은 독립협회가 불충분하다고 여겨 고종황제는 불쾌했고 독립협회가 제국을 폐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자 고종은 독립협회를 폐지해버렸습니다.
고종황제는 많은 암살과 퇴위 시도를 받는데 1898년 7월 안경수가 퇴위시키려하다 발각이 되어 1900년 5월에 처형되었고 1898년 9월 12일 김홍륙은 고종황제의 커피에 대량의 아편을 넣어 암살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1904년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 중에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황제로 만들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려 한다는것을 알고 고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아들인 순종으로 대체하려고 했고 1907년 7월 20일 고종을 퇴위시키게 되는데 박영효, 이도재 등 일부 관료들은 고종의 퇴위를 주도한 이완용 내각의 구성원들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고종황제는 퇴위 후 덕수궁에 갇히게 되었고 1910년 6월 러시아 연해주로 탈출해 망명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합방하고 고종은 황제의 칭호를 잃은 대신 이태왕 이라 불리었고 1915년 이상설의 도움으로 옥중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1918년 이회영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려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죽음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66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는데 일본에 독살된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아직도 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 부인인 명성황후와 같이 묻혀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그의 죽음과 장례식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3.1운동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