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의 시작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안중근은 선흥 안씨인 안태헌과 조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아들입니다.
아명은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다고 하여 안응칠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여러 외국문물을 공부하고 접했지만 무술과 사격술에 관심이 더 있었고, 당시 아버지인 안태헌의 집에 피신하였던 김구선생은 어린 안중근을 '뛰어난 사수이며 책읽는것을 좋아하고 카리스마가 있다' 라고 그의 글에 쓴적이 있습니다.
안중근은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카톨릭교회에들어갔고, 일본인으로부터 도망치다 빌헬름신부의 교회에 숨어들어가 신부와함께 몇달을 지내고나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안중근은 사망할때까지 카톨릭신자였고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조차 아들에게 사제가 되어달라고 할 정도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25세 되던해 석탄사업을 했지만 을사늑약이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당연히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일본식민지배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하기 위해 1907년 블라디보스크로 가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게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무장저항세력의 중장으로 임명되었고 일본에 여러차례 공격을 주도하였습니다.
암살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히로부미와 러시아 대표와의 만남이 있을 하얼빈역에서 일본군 호위대를 통과해 들어갔습니다.
그는 플랫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향해 권총 세발로 저격하였고 세명의 일본인간부에게도 권총을 발사하였습니다.
안중근의사는 러시아어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러시아 경비대에게 체포되어 이틀간 구류된 후 일본군에게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토히로부미의 죽음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감사의 마음으로 십자표시를 했습니다.
대한민국에게는 고결한 애국자의 행동이지만, 카톨릭교에서의 살인은 인정할 수 없기에 빌헬름에게 부탁한 마지막 의식을 한국주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빌헬름신부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그에게 마지막 안식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안중근은 자신을 세례명인 토마스로 부를것을 주장했으며, 법원에서는 한국저항군 중장임을 밝히며 살인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해줄것을 요구하며 이토히로부미가 저지른 15건의 범죄목록을 낭독하고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아래는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15가지 이유입니다.
1. 명성황후의 암살 사건
2. 대한의 황제인 고종을 폐위시킨 사건
3. 대한민국에 14개의 불평등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사건
4. 무고한 국민을 학살한 사건
5. 무력으로 대한민국의 권위를 찬탈한 사건
6. 대한민국의 철도, 광산, 산림, 하천을 약탈한 사건
7. 일본화폐의 사용을 강제한 사건
8. 강제로 대한민국 군인을 해산시킨 사건
9. 대한민국 국민의 교육을 방해한 사건
10. 대한민국 국민의 유학을 금지한 사건
11. 대한민국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사건
12. 대한민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한다고 거짓소문을 세계에 퍼트린 사건
13. 한일관계가 적개심과 갈등으로 가득차 있는데 한일관계가 평화롭다고 일본천황을 속인 사건
14. 아시아의 평화를 깨트린 사건
15. 고메이천황을 살해한 사건(사실은 천연두로 사망했으나 반 막부세력에의해 독살되었다고도 함)
안중근의사가 실제로 한 말입니다.
"나는 한국항쟁군 중장으로서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한일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범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좀 더 우호적이고 평화적으로 유지하여 5대륙 전체의 모범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이토의 의도를 오해하여 그를 죽이지 않았다."
옥중생활과 죽음
안중근의 곧은 성품은 일본인조차도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는 안중근에 대해 동아시아의 의인이며, 정의로운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되는건 믿을 수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6차례의 재판을 거쳐 사형 판결을 받았고, 안중근의사는 예상한 결과라 크게 동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포로로서 총살형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일반범죄자로 교수형으로 선고받게 되고, 1910년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해를 독립 후 대한민국으로 옮겨줄것을 유언으로 요청했지만, 일본이 이를 알고 빠르게 처리해버려 현재 그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토의 암살로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으나, 1993년에 해제 되었습니다.
기념관
안중근의사의 기념관은 한국정부는 1970년 서울에, 중국정부는 2006년에 하얼빈에 만들게 되었습니다.
2013년 중국 방문 중이었던 박근혜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안중근의사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고, 2014년 1월에 하얼빈에 200평넓이의 새로운 기념관이 개관되었습니다.
안중근의사를 추모하는 행사는 그가 투옥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던 뤼순에서 진행됩니다.
최근 2017년 안중근의사의 기념관이 하얼빈시 한국 미술관으로 이전되었으나, 이는 한국의 사드미사일 배치에 따른 중국의 보복으로 알려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