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의 활동
다른 지역에도 존재하지만 주로 제주도의 해녀를 말하며 각종 해조류, 어패류, 기타 해양생물을 채취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강한 의지, 결단력으로 유명한 해녀들은 제주도 내의 반모계 가족구조를 대표한다.
전통적으로 어릴때부터(대략 11세 전후) 얕은 물속에서 해녀로 훈련을 시작하여 차차 더 깊은 수심까지 시도했습니다. 약 7년간의 훈련을 거쳐서 한명의 해녀 몫을 해내는데, 현재 가장 오래된 해녀는 80세 이상으로 66년 이상 잠수하고 있습니다.
해녀의 도구는 오리발, 장갑, 잠수복, 물안경, 가슴무게 추, L자형 갈퀴와 부표가 있는 그물(태왁)로 구성되어있고 해녀들은 채취한 해조류나 어폐류 등을 부표가 있는 그물에 보관합니다.
해녀들이 물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른데, 겨울동안에는 한번에 최대 1시간정도 해루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1시간 후 물에서 나와 3~4시간동안 불옆에서 몸을 녹이고 그 후 1시간을 더 물 속에서 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에는 한번에 최대 3시간 정도 물속에 있었고 현재 해녀들은 잠수복이 도입되어 겨울에도 한번에 5~6시간씩 물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한번 잠수에 해녀는 깊이 30m까지 갈 수 있고 3분이상 숨을 멈출 수 있습니다. 이들의 수확물은 전복, 소라, 문어, 성게, 미역, 조개, 각종 굴과 해삼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항상 해파리나 기상조건, 상어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있습니다.
역사
제주 해녀의 전통은 서기 4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래 해남이라는 남자만의 직업이었고 남편과 함께 일하는 여자를 제외하고는 여성은 없었습니다. 문헌에서 해녀에 대한 첫 언급은 제주 지리한 논문에서 '잠녀'라고 기술한것이 17세기에 들어서였습니다.
18세기부터는 일반적으로 해녀라고 불리는 여성 잠수부가 남성을 웃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에는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는데, 예를들어 17세기에는 전쟁이나 원양 어업 사고로 바다에서 많은 남성이 사망했고 잠수는 여성의 일이 되었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피하지방이 많아 추위를 덜 타 차가운 물에서의 일에 적합하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18세기 문헌에 따르면 말린 전복에도 세금이 부과되어 많은 여성이 임신중에도 바다에 잠수하도록 강요받았다고 나타나 있습니다.
해녀는 남자를 대신하여 여성 중심의 산업이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하면서 잠수의 수익성이 더욱 높아진 이후에 특히 두드려졌습니다. 지금까지 해녀들이 수확한것의 대부분은 정부에 조공으로 바쳐졌지만, 일본이 식민화 한 후엔 해녀들이 시장에 팔아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일본과 한국 상인들이 해녀들을 근로자로 고용하면서 경제상황도 크게 개선되게 되었는데 해녀들이 많이 일하던 인천 인근 연평도에서는 일반 가정 평균소득의 40%~48%를 차지할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제주의 경제와 개인 가족에서 해녀들의 역활이 두드려지게 된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랜기간 지속되었는데 한 예로 1960년대 초에는 제주 어업 수입의 60%를 해녀의 활동이 차지했고 그 남편들의 40%는 여전히 실업상태였습니다.
쇠퇴
다른 많은 역사적, 문화적 관습과 마찬가지로 바닷속 산업도 공업화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한국 정부는 모든 지자체에서 국가 경제를 활성화 시킬 방법을 모색했고 제주도는 공장을 짓기에 실용적인 곳이 아니었기때문에 별도로 감귤을 생산하여 수출하는것으로 확정했습니다. 1969년까지 대다수의 농촌 노동자들이 이 새로운 산업에 합류했고 또한 제주 전체 토지의 2%가 감귤 재배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정부는 제주의 관광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1978년까지 관광업은 농업을 능가하여 제주 최대의 산업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모두 해녀의 수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상황의 바닷일에서 다른 선택지를 부여받은 여성들은 무리지어 해녀일을 포기했습니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5년간 23,081명에서 14,143명으로 빠르게 감소했는데, 해녀의 삶보다 교육의 기회, 신흥 산업의 매력적인 조건은 젊은 여성들이 해녀를 포기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70년 당시 해녀의 31%가 10~20대였고, 55%가 30,40대, 14%만이 50대 이상이었으나, 최근에는 해녀의 98%이상이 50대 이상입니다.
또다른 부흥
이처럼 많은 가정이 수입의 대부분을 해녀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녀들을 필두로 제주에서는 반모계 사회가 발달하게 되고 바다가 유일한 수입원인 마라도같은 제주 앞바다의 작은 섬에서는 전통적인 성 역할 역전이 충분히 나타나 남성은 아이들과 집안을 돌보고 여성은 경제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독특한 사회모습으로는 신부가족에게 지참금을 내고 여자 아이의 출산을 더 축하하는 모습등이 있습니다.(일반적으로는 남자집안에 지참금을 내고 여아보다 남아를 더 선호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제주에서 특정 모계 사회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유교적인 사상을 완전히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는데 제주 사회의 대부부의 것은 우리나라에서의 일반적인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은 모든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 제사를 지내며 재산과 가계를 이어받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게다가 식민지 시대에는 해녀들은 노동자로 있었고, 절대 채취물의 제조 공장의 관리자나 소상공인의 자리까지는 올라갈 수 없었고 집안에서도 대부분의 해녀가 일차적인 간병인이며 적어도 가사의 반은 담당했습니다.
지금의 해녀들은 제주도에서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축하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해녀들의 장비를 보조하고 신선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독특한 제주문화에 대한 기여를 감사하게 여겼고 2014년 3월 유네스코 해녀 무형문화유산 추가를 요청해서 2016년부터 유네스코에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7년부터 대한민국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