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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명량해전

by 붕스 2023. 9. 6.

명량해전 발발의 암시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전사한 뒤 빠르게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 했습니다. 이순신장군에게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해전 초기에 퇴각하여 온전하게 보전된 10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배설은 당초 12척의 배로 퇴각했지만 회룡포로 퇴각하는 도중 2척을 잃게 되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2척의 배를 가져왔고 이순신장군은 이 전력으로 전투를 치루던 중 1척의 배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배설이 잃어버린 2척 중 1척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순신장군은 13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게 되었고, 처음에 이순신장군이 보유한 120여명의 병사에서 칠천량해전의 생존자 병력이 이순신장군에게 집결하게 되고 9월말까지는 적어도 1500명의 수군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선조는 이당시에 조선수군은 다시 복원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군을 해체하고 권율장군 아래로 편입하라는 어명을 내리게 되는데, 이순신 장군은 자필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폐하,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비록 배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수군 본대가 서해로 진출하기 전에 그들은 무장한 정찰대와 함께 여러차례 진로를 조사를 했습니다. 이때 이순신의 함대는 오란포 인근 명량해협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10월 8일 일본수군 8척이 이곳을 기습공격했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이를 격퇴했습니다. 이후 이순신장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여 진도 북쪽에 있는 벽파진으로 향했습니다. 10월 12일 배설은 다시한번 도주하였으나 후에 붙잡히게 되어 탈영죄로 처형당했고, 10월 17일 일본수군 13척이 야간에 기습을 하였지만 이것 또한 격렬한 전투 끝에 격퇴하였습니다.

 

이로써 일본군들은 보고를 통해 조선수군의 잔당이 그들에게 저항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고 소규모의 일본수군으로는 조선수군을 쓰러트리거나 격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보다 많은 규모의 수군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0월 17일 오랑포부근에서 약 55척의 일본수군이 집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더 북쪽인 전라우수영 근처인 명량해협의 반대편에 있는 산 그늘에 조선수군을 은폐했습니다.

 

명량해전의 발발 배경

이순신 장군은 탄핵이 되어 거의 처형 될 뻔한 적이 있는데, 이것역시 조선왕조의 분열정치를 이용한 일본의 간교한 계략이었습니다. 장군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일반병사로 계급이 강등되었고 이순신 장군을 질투하였던 원균은 이순신 장군이 63척에서 166척으로 성장시킨 조선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원균은 무능한 사령관으로 부산 일본수군 기지에 대한 잘못된 작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력이 낭비되게 하였습니다. 도도 다카토라를 총 지휘관으로 한 일본수군은 칠천량전투에서 조선수군을 제압하였고 사실상 전멸 시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부산포대와 남해안의 여러 요새를 보강하여 2차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수군이 철수함에 따라 일본군은 이제 서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이 해로를 통해 북상하면서 병력을 재 보급할 수 있을것이라고 믿었습니다. 5년 전 1592년 이순신 장군은 이 루트로 진행되려는 일본군의 보급을 막고 부산항 본영기지에  배를 숨겨두었습니다.

 

일본군은 2차 전쟁을 시작하여 9월 26일 남원성을 포위하여 점령하고, 9월 7일 직산에서 명나라군과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서해를 통해 수군의 보급과 증원을 기다렸고 수군의 지원을 받게되면 육군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명량해전 전투 준비

이순신장군은 일본수군과의 전투에 마지막 보루로서 많은 지역을 조사한 끝에 명량해협의로 끌어들이기로 했습니다. 일본수군은 물때가 좋을때 분명히 해협으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장군은 일본수군에게 유리한 해협 남쪽에서 전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해류가 더 잔잔한 해협 바로 북쪽의 바다에서 싸우는것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명량해협에는 처음에는 한 방향으로 3시간뒤에 반대방향으로 약 10노트의 속도로 흐르는 매우 강한 해류가 반복된다는것을 깨달았고 협소한 해협이 조선수군을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수군이 측면으로 공격하는것을 방해했고 또한 험한 해류가 일본수군의 빠른 기동을 방해하여 소규모 단위로 공격할 수 밖에 없어 조선수군과의 전투가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조류가 바뀌면 일본수군은 사실상 이순신장군의 수군에서 멀어져 반격의 효과를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명량해전의 전투

 

10월 26일 새벽 일본의 대량 함대를 명량해협 남단의 작은 해변에서 정박하던 이순신장군의 정찰선에게 발견되었고 이순신장군의 수군은 해협 북쪽끝을 봉쇄하기 위해 전라우수영에서 재배치 했습니다. 이순신장군에게 133척의 많은 적함이 공격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일본의 기록에서는 얕은 해협에 들어갈 수 없는 큰 아타케부네는 뒤쪽에 있고 세키부네라고 불리는 중간크기의 배가 앞쪽에서 전진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수군은 해협 북쪽 끝에 배치되어 닻을 내리고 있었고, 이순신장군은 기함으로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지휘하는 일본수군에 선봉으로 진격했습니다. 한동안 이순신장군의 기함만이 전투에서 싸우고 있었고 조선수군은 대부분 칠천량해전의 생존자들로 구성되어있어 일본수군의 압도적인 규모에 크게 동요하고 위협을 느껴 대항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제 기함만이 적의 진형에 대항하고 있ㅆ브니다. 제 배만이 대포와 화살을 발사했습니다. 다른 어떤 배도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를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장교들이 이 싸움이 대규모 전투라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려고도 했습니다. 김억추 전라좌수사가 지휘하는 함선은 12마장 뒤에 있었다." 라고 기록했고  한동안 이순신장군의 기함만이 바다 한가운데 성처럼 서있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이러한 기백은 결국 다른 수군에게 용기를 주었고 다른 배들도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안위가 지휘하는 배가 전진하기 시작했고, 뒤로 김응함이 지휘하는 배도 여러척 전진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배와 소수의 몇척의 용기가 나머지 수군에게도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곧 조수가 바뀌게 되면서 일본수군은 표류하며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혼란속에서 이순신장군은 31척의 일본수군을 격파하며 진격을 명령했습니다. 좁은 해협에 밀집해있는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대포사격의 표적이 되었고 강한 조류로 인해 바다에 빠진 일본수군은 육지까지 헤엄칠 수 없었고 침몰되거나 파손된 배를 포기한 일본인 선원의 대부분이 급한 해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부 한국의 문서에는 파손된 일본수군의 배를 수량으로 기록해놓았는데, 침몰하지 않고 일정한 피해를 입은 일본수군의 배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장군은 일본수군의 피해가 너무커서 조선수군에게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계속 전투를 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역으로 불고 수적으로는 여전히 열세였기 때문에 밤에 당사도 로 철수하기로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명량해전 전투 후

승리 후에도 조선수군은 여전히 남아있던 일본수군에 열세였기 때문에 수군을 재정비하고 방어를 위한 공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철수했습니다. 승리 소식을 들은 후 칠천량의 패배 이후 숨어있던 많은 생존 병력과 배들이 이순신장군의 수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순신장군의 보고에는 칠천량에서 대패한 이후 왜구의 기세가 꺾이고 서해에 진입하지 못하게 된 작은 승리를 거두는 행운이 있었다 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중국수군과 1598년 초에 이순신장군과 합류하는것도 가능해졌습니다.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대부분 파괴된 이후 명나라는 일본수군의 공격을 막기위해 중요한 항구도시에 수군을 배치했지만, 명량에서의 승리가 명나라 정부가 주요 항구의 경비를 완화하고 조선수군을 지원해 중국수군을 배치할 수 있다고 확신시켰습니다.

 

일본수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구루시마는 살해당하고, 도도 다카토라는 부상을 입었으며 일본수군의 피해도 컸는데 포로중 절반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일본수군은 조선 서해로 소규모 침공을 계속했지만 곧 남해안을 따라 철수했습니다. 일본군은 복수를 위해 1597년 11월 23일 이순신장군의 고향을 공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이순신장군의 막내아들 이명을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한 일본인은 조선수군이 명량해협뿐 아니라 주변 해역을 포기하고 전투 후 퇴각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수군의 승리라고 주장하지만,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수십권의 책에도 이 싸움을 조선수군의 결정적인 승리라고 요약하고 있고, 일본 제국 해군이 발간한 책에도, 근대 일본 역사학자 대부분도 이 싸움은 한국의 결정적인 승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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