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배경
3.1운동은 1919년 초 한국인에 의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과 일본문화의 강제적 합병 중지를 요구하는 비폭력 항의 운동입니다. 만세시위라고도 불리우는 3.1운동은 한국 독립을 위한 가장 큰 항의 운동 중 하나로 알려져있으며 향후 독립활동의 기폭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33명의 한국 문화 및 종교 지도자가 선언문을 발표했고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서울에서 지지하는 행동을 했으며 다른 많은 도시에서도 1000개 이상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잔혹하게 진압되어 한국의 역사학자 박은식이 약 7,500명이 사망하고 1만6,000명이 부상하고 4만6,000명이 체포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전후 일본이 항복한 지 수 년 후 한국은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고 오늘날 3월 1일은 대한민국에서는 공휴일로 기념하고 기억하려하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3.1운동은 1910년에 이어 일제의 사실상 군사통치 아래 식민지 점령의 억압적 성격에 맞서 일어난 운동으로 1918년 1월 미국의 토마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파리평화회의에서 선언한 민족의 '자결권'을 명시한 '14개 항목'에서 영감을 받은 운동으로 윌슨의 연설을 들은 한국 유학생들은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에 승하하셨는데 그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확산되면서 러시아 공사관의 통역관인 김홍득의 이전 시도(커피음모)가 무산된 이후로 더욱 신빙성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행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 음식점에서 3.1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33명의 인물이 모이게 되고 그들은 역사학자 최남선씨가 작성한 대한민국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이들은 당초 서울시내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열 예정이었지만 폭동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해 보다 사적인 장소를 택하고 지도자들은 그 문서에 서명하고 일본 총독에게 사본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 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기대어 이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이를 널리 밝히며, 민족의 오래도록 변함없을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에 따른 세계 개조의 기회에 따라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가 함께 생존하고 같이 살아 나갈 권리의 정당한 움직임이니 하늘 아래 어떠한 것이든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 할 것이니라. 중략"
운동 지도자들은 중앙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그들의 행동을 알렸고, 이후 공개적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대한민국도 공식 선언 이전에 일본 국민들이 신문이나 언론을 통해 듣도록 다음과 같은 불만을 방송했습니다.
아래의 불만은 토마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 요점' 연설에서 큰 영향을 받은 내용입니다.
- 한국인과 일본인을 고용할 때 정부에 의한 차별, 정부 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한국인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질 차이입니다.
- 일본인에 의한 한국인 학대와 공공연한 무시입니다.
-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들은 모두 오만했습니다.
- 한국의 상류층이나 학자에 대한 특별한 대우는 없었습니다.
- 행정절차는 너무 복잡해서 새로운 법이 자주 통과되어 일반인들이 따를 수 없었습니다.
- 너무 많은 강제 노동이 대중에게 있었습니다.
- 세금은 너무 올라서 한국인은 이전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면서 동일한 서비스를 받고있습니다.
- 토지를 개인적인 이유로 일본인들이 계속 몰수했습니다.
- 일본인들이 한국의 문화와 가르침을 억압하려했다는 이유로 마을 선생님들은 일선에서 쫒겨났습니다.
- 한국의 자원과 노동력은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착취되었습니다.
서울 시내 파고다공원에는 학생 정재영씨가 선언문을 낭독하것을 듣기위해 대군중이 모였습니다. 그 후 집회는 평화적인 행렬이 되었지만 일본 헌병대는 진압하려 하였습니다. 이날 오후 2시에는 전국 각지에서도 독립선언문 사본이 낭독되었습니다.
행렬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일본의 경찰이나 헌병대는 군중을 통제하지 못했고 일본 관리들은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요청했고 시위가 확대되면서 탄압은 폭력으로 바뀌게 되고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과 기타 잔학행위가 발생했습니다.
약 200만명의 한국인이 1500회 이상의 시위에 참가했고 수천 명의 한국인이 일본 군대와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박은식씨가 자주 인용하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849명, 체포 46,303명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 일본정부는 553명이 사망하고 12,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고 보고했고, 일본 경철과 군은 8명이 숨지고 158명이 다쳐 이에 대한 벌로 체포된 시위자 중 일부는 공개 처형되었습니다.
일본이 시위자들을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관순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의 독립을 외침으로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이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사망하게 되었고, 현재는 '유관순 누나'라고 불리며 대한민국에서는 영웅 중 한명으로 알려져있습니다.
3.1 운동의 영향
3.1 운동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이 횡성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기폭제가 되었고 그 후 일본인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으로 많은 지도자들(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하이 등 중국 각지로 망명하여 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이 운동은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도와 다른 많은 나라에서 비폭력적인 저항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후 중국 민족주의 정부에 의해 한국 독립군이 결정되어 중국에서 활동하는것이 허용되었고 이 기간 대한민국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활동가들이 동원되어 미국, 중국,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서 활동이 장려되었습니다.
일본정부는 3.1 운동에 대해 탄압을 강화하고 '조선만세소요사건'이라고 의미를 낮추어 대응했습니다. 통제불능의 책임을 인정한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은 사이토 마코토로 교체되었습니다. 군사경찰은 민간군으로 대체되고 '문화정책' 이라는 미명하에 제한된 보도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이러한 보여지기식 관대한 정책은 대부분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 중에 없어졌습니다.
1949년 5월 24일 한국은 3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