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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세종대왕

by 붕스 2023. 9. 11.

요약

세종(1397년 5월 15일 ~ 1450년 4월 8일)은 조선의 4대 왕이자 한글을 발명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세종대왕이 모셔진 영릉

 

역대 한국역사의 군주 중에서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왕입니다.

 

12살에 충녕군으로 봉해진 세종은 태종과 첫째부인인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1418년 태종이 첫째였던 양녕대군의 행실에 장자 계승의 원칙을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고 셋째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퇴위한 후 1422년 사망할때까지 실권을 계속 쥐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1422년 태종의 사망 후 28년동안 왕위를 지켰습니다.

 

세종은 유교와 성리학을 강화하고 주요 법률개정을 하였습니다. 직접 한글을 창시하고 과학기술 발전을 장려하며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북쪽으로 군사를 올려 영토를 넓히고 남쪽으로는 왜구를 토벌하였습니다.

1439년부터 병이 심해지게 되고 1442년부터 세자 향(후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야에서의 업적

1397년 5월 15일(그레고리력 기준)에 출생하여 현재 스승의 날과 함께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종은 태종의 첫째부인인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열두살때 충녕대군이 되어 어린시절 자신의 두 형들보다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고있었습니다.

 

셋째아들로서의 세자가 되는것은 특이했습니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1404년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자유분방한 성격과 사냥과 여자들을 밝히는 망나니같은 성격때문에 1418년 6월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일간의 기록에 의하면 충녕대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그랬다고 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아니며,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은 승려가 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이 세자자리에서 내려온 후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고 이에 반대를 하는 관리들을 숙청했습니다. 1418년 9월 태종은 퇴위하였으나 그 후에도 정책에 계속 영향을 주었고 세종대왕의 놀라운 정치적 수완과 창의성은 1422년 태종이 사망할때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세종대왕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등용하였습니다.  또한 유교에 따라 의례를 치르고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것을 장려했습니다.

 

외부 승려의 한성 출입을 금하고 7종의 불교를 2종으로 축소시켜 그들의 부와 권력을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세종의 토지개혁으로 이어지는데 사찰땅을 압류하여 개발을 위해 재분배되면서 승려들은 경제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려시대에 승려는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주었었기때문에 승려들이 돈과 권력에 타락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명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냈는데 북부에 여진족의 세력이 너무 커서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던곳에 최윤덕장군과 김종서장군을 파견해 4군 6진을 설치해 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혔고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3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대마도 근처에서 활동하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원정을 보내는데 이 전투로 245명의 일본군이 사망하고 11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180명의 조선군이 사망했습니다. 1419년 7월 휴전이 이루어졌고 계해조약에서 대마도 다이묘는 조선에게 조공할것을 약속했고 그 댓가로 조선은 대마도 다이묘에게 양국 무역에 관한 우선권을 부여했습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앴는데 조선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군사규정을 만들고 대포 개발을 포함한 군사 기술의 개발을 지원해 다양한 종류의 화포와 불화살은 물론 화약의 테스트도 진행되었습니다.

 

1420년 세종대왕의 과학에 대한 애착으로 경복궁 내에 집현전이라 불리는 국가 기술을 발전시킬 목적의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민을 돕고 싶은 마음에 학자들을 내새워 농업 안내서격인 농사직설을 편찬해 다양한 농업기술을 알리는데 이 기술들은 새로 채택된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재배 방법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측근 중 한명은 위대한 발명가 장영실이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선천적으로 창의적이고 똑똑한 사상가였던 장영실을 세종대왕이 눈치채서 한성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이에 부흥한 장영실은 물시계 자격루, 해시계, 혼천의 등 새로운 물품을 만들었습니다.

1442년 장영실은 세계 최초의 표준우량계 측정기구인 측우기를 발명했고, 1434년에 새로운 활자인쇄기인 갑인자를 발명하는데 이것은 구리-아연과 납-주석의 합금으로 구성되어 이전 모델의 2배나 빠른 속도를 내었습니다.

 

세종은 중국 수도의 경도를 바탕으로 한 한국 역법을 바꾸어 '칠정산'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천문학자들에게 조선의 수도 한성을 자오선으로 한 달력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이를 통해 조선 천문학자들은 일식과 월식의 타이밍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의학의 영역에서는 재위기간 중 두가지 중요한 서적이 간행되는데 '향약집선방'과 '의방유취'였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국어 표음표기체계인 한글창제와 도입으로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 등 당시 기록은 세종이 직접 문자를 발명했다고 표기되어있습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중국어를 사용했으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공부해야할 글자의 수가 너무 많아 백성들이 글쓰기를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당시에는 많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톡특한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각 자음자는 문자와 관련된 소리를 낼 때 나오는 패턴을 단순화한 도식을 바탕으로 하고 모음은 하늘을 나타내는 점과 선의 조합으로 형성했습니다. 

 

한글은 1443년에 완성되어 훈민정음이라는 33쪽의 설명과 함께 1446년에 출판되었으며, 글자가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철학적 이론과 동기를 설명했습니다. 이 책은 누구나 며칠 안에 문자를 배울 수 있다고 표기되어있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몇시간만 공부하면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일반적인 문자체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아 양반계급의 반발을 샀습니다. 농민들에게 읽고 쓰는 능력을 주면 그들이 반발을 할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조선의 양반들은 세종 사후에도 계속 한자를 사용하였고 한글은 양반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언문, 암글 등으로 비하되어 알려지기도 했지만 여성과 소설가들사이에서는 인기를 얻었습니다.

 

죽음

세종은 1450년 당뇨명 합병증으로 실명했습니다. 4년 전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와 같이 경기도 여주시에 소재한 영릉에 묻혔습니다. 

첫째아들인 이향(후 문종)을 왕으로 세웠으나 세종은 병약한 문종이 장수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임종할 때 어린 손자인 단종을 돌봐달라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요청했습니다. 예상대로 문종은 즉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수십년간 누려온 정치적인 안정은 12세의 나이로 6대 왕이 된 단종에 와서 붕괴되었습니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이 1455년 왕위를 빼앗았고 단종의 복권 음모를 알고 세종때의 여러 대신과 함께 단종을 처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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