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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태조 이성계

by 붕스 2023. 9. 9.

태조 이성계(1335년 10월 11일 ~ 1408년 5월 24일)는 조선왕조의 시조이자 초대 와으로 고려를 몰락시킨 후 1392년 즉위하여 6년 뒤 아들들의 다툼으로 왕위를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에서 고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건물로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해있다

 

태조는 변화보다는 고려의 연속성을 강조했습니다. 통치기간 중 새로운 제도는 만들지 않았고 대규모 숙청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태종은고려때의 관료들을 계속 등용했고 일본과 우호관계를 재구축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했습니다. 

 

이성계의 일생

출생과 장군이 되기까지

태조의 아버지는 몽골이 이끄는 원나라를 섬겼던 고려인 관리 이자춘이었고 어머니 최씨는 등주 출신으로 원나라를 섬겼던 또다른 고려인 관료인 명문 가문의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밍간(징기스칸이 만든 1000호 규모의 사회집단)사령관으로 승진하였습니다.

 

918년 왕건이 수립한 고려는 수년간의 전쟁과 무너진 몽골제국의 사실상의 점령으로 14세기 말 400년의 기반이 붕괴되었습니다. 왕실의 정체성 또한 조정 내에서 점점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집권한 왕족이 실효적으로 통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문의 잦은 경쟁과 그 가문들간의 강제 결혼에 의해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임왕의 아들인 우왕의 친모가 노예로 알려지며 혈통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문들이 돌았습니다.

 

영향력있는 대신들과 장군들은 왕실의 총애를 위해 싸웠고 궁정의 지배를 놓고 싸운 결과 여러 파벌간에 깊은 분열이 생겼습니다. 홍건적과 왜구의 고려 습격이 증가함에 따라 궁궐을 장악하게 된 것은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이었고 실제적으로 외세에 대항할 수 있던 이성계와 라이벌인 최영장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조가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원나라는 취약해져가고 있었고 고려는 1350년대 중반까지 독립을 회복했지만 원나라의 잔당들은 사실상 대규모 주둔지로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1360년 무관으로 시작하여 차차 고위직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1361년 10월 반기를 든 박의를 처단하였고 같은 해 홍건적의 침략에 3000여명의 병력으로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는데 도움을 주고 1362년 나하추 장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이성계는 1370년대 후반부터 1380년대 초반까지 몽골의 잔해를 고려에서 몰아내고 일련의 전투로 잘 조직된 왜구를 격퇴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습니다. 명나라의 주원장이 대두됨에 따라 고려왕실은 이성계장군이 이끄는 진영과 최영장군이 이끄는 진영의 두 파벌로 나뉘었습니다.

 

1388년 명나라의 사진이 고려 북방영토의 상당부분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자 최영장군은 이기회를 통해 옛 고구려의 후예라 칭하는 자신들이 당시 만연한 반명의 분위기를 이용해 요동반도를 침략하여 만주를 고려영토의 일부로 복원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4불가론까지 꺼내며 강력히 반대하는 이성계가 요동반도 침략을 주도할 인물로 선정되었지만 압록강 위화도에서 한국사의 흐름을 바꿀 위화도 회군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고위 관료들과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고 개경으로 돌아와 정부의 통제권을 확보하기로 했습니다.

 

역성혁명의 시발점

이성계는 압록강에서 군대를 수도로 직행시켜 왕에게 충성하는 최영장군의 병사를 물리치고 사실상 반란으로 우왕을 폐위시켰지만 스스로 즉위하지 않고 우왕의 8살된 아들 창왕을 왕위에 앉혔다가 원 군주의 회복시도가 실패한 후 둘 다 처형해버렸습니다. 이성계는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지만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꼭두각시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정을 장악한 후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과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 중 하나는 1392년 이성계의 아들 중 한명인 이방원이 이성계의 고풍스러운 서식의 시로도 설득을 못한 정몽주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것입니다. 정몽주는 이방원 자신도 물론이거니와 고려 전역에서 추앙받는 학자이자 정치가였지만 새 왕조의 지지자들의 눈에는 제거될 대상으로 보였고 연회가 끝난 후 선죽교에서 5명의 남자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 선죽교는 현재 북한의 국가기념물이며 돌 중 하나에 있는 갈색 반점은 정몽주의 피로 비가오면 붉어진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통치와 죽음

이성계는 공양왕을 1392년 강제로 퇴위시키고 원주로 추방하고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고려의 475년의 역사를 종료합니다. 1393년 이성계는 국가명을 '조선'으로 내세웠습니다.

 

그의 초기 업적 중에는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이 있었는데, 이는 태조가 청나라의 도적의 습격에 대응하여 공격하기를 거부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명나라 왕조에 고려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알렸습니다. 우호적인 관계의 재정립을 위해 일본에도 사절단이 파견되었습니다. 사절단의 임무는 성공했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이 사절단에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알려졌습니다. 류큐왕국으로부터의 사신은 1392년, 1394년, 1397년에, 또 시암으로부터는 1393년에 사신을 받았습니다.

 

1394년에 한성(현재의 서울)에 수도를 정하고 조선이 공식으로 선포되었을때 어떤 아들이 왕위 계승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의 5번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의 권력 승계에 가장 기여했지만 두 핵심 동맹자였던 정도전과 남은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양측은 상호 적의를 충분히 인식하고 항상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방원이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두각되자 정도전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성계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은 나라를 위해 최선이라고 느낀 아들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설득했습니다.

 

이성계는 1392년 자신의 여덟번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1396년 신덕왕후의 급사한 후 이성계는 아직 아내를 애도하는 동안 정도전은 궁궐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방원과 나머지 형제들을 먼저 살해하려고 공모하기 시작했습니다.

 

1398년 이 계획을 알게 된 이방원은 곧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급습하고 신하인 정도전과 고 신덕왕후의 두 아들을 살해했는데 이 사건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태조는 아들들이 왕위 계승을 위해 서로 죽였다는것에 경악하고 신덕왕후의 죽음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것을 알고 곧바로 둘째아들 이방과(정조)를 새 후계자로 명하고 퇴위했습니다.

 

이후 태조는 함흥에 은거하여 이방원과 평생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방원은 선왕에게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고 그때마다 아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표명하기 위해 처형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 일이 '함흥차사'라는 말을 생겨나게 만들었는데 몇번이고 찔러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태조는 실제로 사신을 죽이지 않았고 우연히 일어난 반란에 사망한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400년 정종은 다섯번째 동생 이방원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자진 퇴위할것을 선언했습니다. 그해 이방원이 마침내 조선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조는 퇴위 10년 후인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건원릉에 매장되어있고, 태조의 탯줄무덤은 충청남도 금산시 만인산에 아들 정종의 탯줄과 같이 묻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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