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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 들

광해군

by 붕스 2023. 9. 8.

광해군의 출생

선조의 둘째아들로 첩이었던 공빈 김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을때(임진왜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당시 왕이었던 선조는 북쪽인 명나라 국경까지 도망쳐 지원을 요청하고 방어를 했습니다. 1차 임진왜란때와 그 후 늙은 선조 대신 조선왕조의 실질적 통치자였고 왜란 이후 황폐해진 나라의 재건을 했습니다.

 

창덕궁

 

그러나 그러한 광해군도 지위는 항상 불안정했습니다. 무능한고 포악한 성품을 지닌 임해군과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의 아들이며 소북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영창대군이 있었고 명나라 또한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책봉 승인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에게 다행히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하는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북인들의 횡포

선조가 돌아가시기 전 영창대군은 너무 어려 광해군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는 문서를 만들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소북파였던 유영경이 이 문건을 숨기고 영창대군을 왕위로 만들려고 한것을 대북파인 정인홍이 알게 되어 유영경은 즉시 처형이 되고, 영창대군은 이듬해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사건 이후 다양한 정치적, 지역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을 중용하려 하였으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대북파는 소북파를 끊임없이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1613년에는 대북파가 소북파의 지지를 받는 영창대군을 공격하여 외할아버지 김제남은 반역죄로 처형되고 영창대군도 망명하여 처형당했습니다. 동시에 대북파는 소북파를 탄압했고 1618년에는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폐위되고 투옥되었으나 광해군은 이것들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광해군의 업적

광해군은 사후 평판은 나빴지만, 유능하고 실용적인 왕이었습니다. 국가의 회복에 힘썼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문서 복원도 후원했습니다. 재건의 일환으로 토지조례를 개정하여 땅을 백성들에게 재분배하고 창덕궁 재건과 임진왜란때 화재로 훼손되었던 다른 여러 궁궐을 건설하도록 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호패를 다시 도입하였습니다.

 

외교문제에서는 명나라와 후금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했습니다. 조선이 후금의 군사력에 대항할 수 없다는것을 알고 명나라와 후금의 전투에서 명나라가 요구한 군사를 일부 지원해 주지만 따로 후금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실리 외교를 했습니다.하지만 명나라를 따르는 서인세력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명나라는 1619년에 후금과의 전투에서 조선에게 지원군을 요청했고 조선은 강홍립장군, 김경서장군과 일부 군사를 지원해주었으나 사후르전투에서 후금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부차전투에서 강홍립장군은 2/3 병력을 잃고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였으나 본의 아니게 출병하였음을 알리는 광해군의 밀지를 전달해 다음 전쟁을 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609년 기유조약으로 임진왜란 후 대일 무역을 재개 하였고 1617년 주일대사를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국내에서는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이 세금을 더 쉽게 낼 수 있게 하였으나 대동법은 당시 최대 곡창지였던 경기도에서만 시행되어 전국으로 확대되기까지는 100여년이 더 걸렸습니다. 또한 출판을 장려하여 재건을 가속화하고 이전의 번영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광해군의 재위기간동안 의학서인 동의보감, 홍길동전 등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집필되고 소실되었던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적 책들이 다시 간행되었습니다. 1616년 처음으로 담배가 전래되면서 조선 양반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폐위와 말년

1623년 4월 11일 광해군은 서인에 의한 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김류, 최명길, 이귀 등과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의 반정은 밤에 일어났고 광해군은 도망을 갔으나 나중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1641년에 사망하게 되는데 일설에는 독살로 인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왕릉은 없고 광해군과 폐비 유씨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비교적 소박한 곳에 묻혔습니다. 서인은 능양군을 16대 왕인 인조로 받들었고 명나라를 따르고 후금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펴 후에 두차례의 호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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