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1079년 2월 11일 ~ 1122년 5월 15일)은 고려의 16대 왕입니다. 숙종과 명의왕후의 장만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그의 치세는 보통 예술과 철학이 번성하고 국경 경비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 강화 정책이 시행된 고려에서 황금기 중 한 시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생
예종(왕우)는 문종 재위 33년만인 1079년 태어났고 1095년 헌종을 퇴위시키고 왕이 된 숙종과 명의왕후의 장남이었습니다. 1100년 21세에 세자가 되었고 1105년 숙종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중 사망하자 황이 되었습니다.
즉위하자마자 예종은 숙종때 발생한 여진족과의 갈등에 직면해야함을 깨달았습니다. 11세기 말에는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동북아시아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고려와의 관계도 불안정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만주와 조선 북부 발해의 일부였음에도 고구려에서 그 후손을 쫓아다녔으며, 고려를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 라고 부르며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습니다.
숙종 때 고려는 여진족과 두번의 싸음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주요 원인은 보병이 적의 기병에 대항하는 고려군의 구성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별무반으로 개편되었으나 숙종의 죽음으로 무산되었습니다. 고려와 여진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예종은 아버지의 개혁을 이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107년 10월 여진족이 북동쪽 국경에 침입하자 17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윤관장군이 두달안에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두만강으로 진출하였습니다. 1108년 4월 이지역을 지배하는 9개의 성을 건설하고 여진족들이 영토 내로 이동하여 물자를 얻는것을 막기 위한 조치가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리정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에 고려군은 적에게 포위되어버렸습니다. 여진족은 9성을 넘겨주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고 1109년 5월 예종은 그동안 고려 영토가 기근과 질병에 휩쓸린것을 생각하여 여진족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이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여진족의 완안아골타(완옌아구다)는 거란족의 요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치루어 승리한 후 금나라의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요나라는 고려에 도움을 청했지만 대다수 조정의 견해는 여진이 승리하고 요나라는 무너질것으로 판단해 거부했습니다.
1117년 고려군은 압록강 의주지역으로 진군하여 영토를 재점령하고 그곳에 새로운 군사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예종은 9성을 여진족에게 넘긴 지 두달만인 1109년 7월 국자감에 오경 주예에 기초한 무학7과목을 소개했습니다. 1116년 청영각, 보문각 등 학술기관과 도서관을 설립하고 인재육성을 위해 1119년 장학재단 양현고를 설립했습니다.
즉위 후 교육문화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정책으로 예종은 몇가지 이점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정부의 교육은 오랫동안 사립학교의 번영에 의해 추월당했지만, 예종에 의해 도입된 개혁으로 역전이 되었습니다. 또한 훼손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종은 불교와 도교에 관심이 많아 재위기간 내내 이들을 지지했고 왕실 건축정책을 추구할때도 풍수에 이끌렸습니다. 종교적 신앙의 경계는 모호했습니다. 1106년 도교의식을 거행하고 동시에 태종에게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1110년 송나라의 황제는 고려에 사절과 사제 2명을 파견하여 사람들에게 도교를 가르쳤고 같은 해 예종은 국내 최소의 도교 사찰인 복원궁을 7년간 공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사찰과 종교시설을 개보수하고 유학자 곽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종종 궁궐로 초청하여 조언을 구하고 시를 교환하기도 하였습니다.
숙종은 동전과 은화를 도입하고 은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태조에 의해 확립된 물물교환경제와 과세, 대중감정과 시장의 저개발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대립적 관료주의에 직면해야했습니다. 예종은 요나라가 화폐를 도입한 것에 주목하여 화폐의 사용을 옹호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은 화폐 사용 반대의 이유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태조의 10계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종은 태조의 경고가 낭비와 불필요한 지출에 대한것이라고 대답하고 통화정책을 주장했지만 결국 화폐가 대규모로 확산되는 데 실패했고 대신 은화는 귀족을 중심으로 왕조 말기까지 사용되었습니다.
1109년, 1110년, 1117년, 1120년에는 기근과 역병, 그리고 몇가지 자연재해를 겪었습니다. 재채 농가의 긴급사태를 비롯한 피해나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지방행정,제세,노동제도를 재 정비하고 군용지 경작이나 폐지의 개척 등 농업진흥정책을 실시했습니다. 1112년 혜민국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을 무료로 나누어주기 위해 탄생되었고 1113년에는
예의상정소가 의복, 예절, 문서관리에 관한 새로운 규칙을 정의하기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죽음
예종의 통치 말기에 왕해(후 인종) 태자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11세의 헌종을 상대로 즉위한 아버지 숙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염두에 두고 어린 왕자가 왕이 되면 다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력한 힘으로 태자를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강력한 영향력있는 귀족가문인 이자겸을 선택했습니다.
1122년 예종은 태자 왕해에게 양위하고 사망하였습니다.
능은 개성시 개풍군 릉골에 위치한 유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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