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
목종(980년 7월 5일 ~ 1009년 3월 2일)은 고려의 7대 왕이며, 목종의 부모를 포함한 모든 선대가 왕과 왕후로 가계도 면에서는 최고의 혈통이었습니다.
일생과 죽음
왕송(목종)은 경종 재위 5년에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경종이 사망하자 삼촌인 왕치가 왕위를 계승하여 성종이 되었습니다. 목종은 997년 성종이 사망한 후 왕이 되었고 어머니인 헌애왕후의 섭정을 받았습니다.
목종은 전시과를 개혁하고 많은 곳에 성을 쌓기도 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등 무난한 군주로서 통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인 헌애왕후와 통정한 김치양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 효심이 강한 목종은 이를 간과하고 동성애로 빠지는 등 여러 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는 반란을 꾸미자 강조장군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막으려 했지만 음모를 둘러싼 난투 과정에서 목종은 강조장군에 의해 퇴위되었습니다. 어머니인 헌애왕후와 함께 충주로 유배되었지만 충주에 도착하기 전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목종의 능은 공릉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후에 의릉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현종
현종(992년 8월 1일 ~ 1031년 6월 17일)은 고려의 8대 왕으로 태조의 손자입니다. 현종은 목종이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음모를 진압하려 개경으로 불러들인 강조장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현종은 학국 역사상 유일한 사생아 출신입니다.
일생과 죽음
1010년 거란은 고려 내부의 권력투쟁 중에 다시 침략하였습니다. 현종은 일시적으로나마 수도를 벗어날 수 밖에 없었고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나주까지 남하하라고 조정에 명했습니다. 결국 고려는 거란군을 격퇴하고 강제로 고려의 땅에서 철수 시켰습니다.
고려가 북방영토 반환을 계속 거부하던 1019년 거란은 다시 침략을 가했습니다. 강감찬 장군을 비롯한 고려 장군들은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에게 큰 손실을 입힐 수 있었고 거란군은 요구를 달성하지 못한채 철수하여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라와 고려는 이후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고 문화는 전성기에 달했습니다.
현종은 초조대장경 편찬을 지시했는데 후에 팔만대장경이 초조대장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부처의 도움을 받아 운명의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 여겨졌던 목판을 조각하는 행위였습니다.
현종은 재위기간동안 거란의 2차, 3차 침공을 막고 내정을 정비하였으며 불교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고 도성제를 정비하는 등 고려의 태평성대 기반을 닦은 왕이었습니다. 현종부터 17대 왕인 인종까지 고려는 황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현종의 후사는 세명의 아들이 후에 왕이 되었고 형제들간에 권력다툼이 없이 우애좋게 왕위를 이어나가 안정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현종은 22년간 재위 후 1031년 6월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에 묻혔습니다.
덕종
덕종(1016년 6월 9일 ~ 1034년 10월 31일)은 고려의 9대 왕입니다.
일생과 죽음
현종의 첫째아들인 덕종은 1022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그의 즉위기간동안 아버지에 의해 시작된 국사가 완성되고 천리장성 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1031년 즉위한 덕종은 거란에 대해 강경한 외교정책을 폈습니다. 덕종은 거란족이 고려의 포로들을 돌려주고 압록강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요청이 거부된 후 그는 북부 국경 강화로 돌아섰습니다.
덕종은 내치로도 여러가지 크고 작은 치적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인재등용의 폭을 넓히기 위한 국자감시를 시행한 것입니다.
죽음
덕종은 현종이후 태평성대를 잘 이끌어나갔지만 태생적으로 몸이 약해 재위 3년만인 1034년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사망했습니다.
능은 개경 북효에 위치한 숙릉에 묻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