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일생 요약
프랑스에서 태어난 빅토르 마리 위고는(1802년 ~ 1885년) 낭만주의 작가이지만, 정치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중의 한명으로 여겨지며, 집필 방식 또한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여러가지 작품활동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인정받는것은 1831년에 완성한 '노트르담 드 파리' 와 1862년에 완성된 '레미제라블' 이라는 소설입니다.
또한 소설뿐아니라, 시인으로도 유명한데 대표적으로는 '시대의 전설' 과 '명상' 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살아생전과 사후에서 음악에 영향을 주었고 작가와 시인으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사형제의 폐지도 주장한 운동가였습니다.
모든 예술쪽으로 능통해서인지 모르지만, 4000점 이상의 그림도 제작한 화가로도 알려져있습니다.
정치인으로의 활동을 보면,
젊은시절에는 왕당파로 활동하였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열렬한 공화주의파로 활동하며 상원의원까지 되었습니다.
그시대의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와 예술적경향을 많이 내포하고있으며, 문학적인 지위는 프랑스의 영웅으로까지 불리게되었습니다.
많은 활동을 하던 위고는 83세의 나이가 된 1885년에 사망하게되며, 200만명이 참석한 역사상 최대규모로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그의 사망은 국장으로 치루었고, 파리 판테온에 묻히게되었습니다.
위고의 가족
위고는 아델후처와 1822년에 결혼하고 46년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아이들은 1823년 첫째아들인 레오폴드를 가졌고, 1824년 큰 딸 레오폴딘, 1826년 둘째아들인 샤를, 1828년 셋째아들 프랑수아빅토르, 1830년 아델 이렇게 다섯자녀가있었지만, 첫째는 유아기에 사망하게 되었고, 첫째딸인 레오폴딘도 결혼하고 얼마되지않아 배가 전복하게 되며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위고는 이후 딸에대해 많은 시를 쓰게되었고, 그의 가장 유명했던 시중 하나는 "Demain, dls l'aube" (내일새벽에...)로 여기서 그는 그녀의 무덤을 방문하는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위고의 작품과 음악과의 연관
위고는 음악적능력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음악계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됩니다.
그는 레미제라블에서 나오는 사냥꾼합창을 가장 아름다운곡으로 평가하고 있고, 그루크, 모차르트, 베버 등 많은 음악가의 작품을 즐겼지만, 베토벤을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19세기에 헥터 베를리오스와 프란츠리스트는 위고의 친구였습니다.
프란츠리스트는 베토벤의 음악을 위고의 집에서 연주했었고, 위고 또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농담을 썼었는데, 내용은 '리스트의 레슨으로 좋아하는 곡을 손가락 하나로 칠 수 있었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19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1000점이 훨씬 넘을정도의 음악작품이 위고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현재 100편이상의 오페라가 위고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고있을정도입니다.
또한 발레, 오페라 뿐만아니라 레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 등 뮤지컬제작으로 뮤지컬극장을 만드는데도 한 몫을 하게 되었고, 위고의 시를 바탕으로하여 베를리오스, 파울레, 라흐마니노프와 바그너 등의 많은 작곡가들이 만든 음악작품도 있습니다.
현재도 위고의 작품으로 많은 뮤지션들이 작품을 만들고있습니다.
일례로 소설 '사형수의 마지막날'은 2007년에 오페라화 되었고, 리브레토가 초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위고의 그림
위고는 4000점 이상의 작품을 만들었고, 현재 3,000점 정도의 작품이 남아있습니다.
위고는 보통 짙은 갈색, 검은색 펜과 잉크를 사용하였고, 거의 없지만 드물게 색을 칠하기도 하였습니다.
위고의 다른 연인들
1833년부터 사망할때까지 위고에게 헌신한 줄리엣 도루에가 있습니다.
위고는 아내가 죽은 1868년이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와 많은 여행을 함께하였고, 망명까지도 같이 갔을 정도로 헌신하였습니다.
유부녀였던 레오니 도네와는 7년 넘게 사랑하였으나, 유부녀였던 레오니도네와 1845년에 간통죄로 체포되었습니다. 다만 귀족회원이었던 위고는 비난을 피해갔으나, 레오니는 감옥과 수녀원에서 지내야했습니다.
위고는 많은 여성들(매춘부, 여배우, 하인 등)을 성행위를 위해 찾았습니다.
그는 사무엘 피프스처럼 색정광으로 불릴만한 일상을 비밀로 표현하기위해 자신만의 코드를 사용하여 적었습니다.
위고의 쇠퇴와 말년
위고의 아내는 1868년에 사망하게 되고, 애인 출리엣두로에는 위고 자신이 죽기 2년전인 1883년에 사망했습니다.
1876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지만, 그는 고집이 세고 상원에서는 아무 역활도 하지못해 상원의원으로서는 실패했습니다.
1885년에 83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하기 이틀 전, 그는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다" 라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는 문학계의 거물로 추앙받았고,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만든 정치인이었습니다.
위고의 기념관
1959년에 프랑스의 화폐에 위고의 초상화가 새겨지는 등 여러방면에서 존경을 받고있습니다.
파리시에서는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있고 룩셈부르크에서 체류했던 주거지도 기념관으로 관리하고있습니다.
위고의 이름을따서 빅토르위고 거리도 있고, 광장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딴 지하철역도 있습니다.
그의 고향에는 그의 이름의 학교가 설립되었고, 퀘벡과 샌프란시스코에도 위고 이름의 거리가 생겼습니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미술관 맞은편에 위고의 동상이 있고, 캔사즈 시의 지명과 쿠바에도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있습니다.
그뿐아니라 소련우표에도, 중국 베이징의 위고 흉상 등 위고는 아직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널리 기억되고 있습니다.